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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4 (feat. 감정 중독의 시대)

Christi-Moon 2024. 9. 22. 09:09

밀란 쿤데라의 작품 <불멸>중 4부 '호모 센티멘탈리스'는 인간이 얼마나 감정에 중독되어 사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 "호모 센티멘탈리스" 부분을 읽으면서 이제껏 감정에 노예로 살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 감정을 얼마나 굉장한 가치로 여기고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이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살았는지 반성도 하게 되었다. 
 
<불멸>의 4부 "호모 센티멘탈리스"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사후에 벌어진 베티나와 괴테 사건에 대한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반파시스트 지식인 소설가 로맹 롤랑,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를 썼던 폴 엘뤼아르의 증언을 토대로 이야기가 시작 전개된다. 밀란 쿤데라는 이 명성을 지닌 실제 작가들에 대해 지니고 있던  자신의 비판적 시각을 이 부분에서 전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세명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도취되어 괴테를 향한 베티나의 사랑을, 미화시켜 글로 풀어낸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드라마도 감정에 중독되게 만드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마치 사랑이라는 감정이 실제 하는 것처럼 말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연인들의 사랑을 진실이라고 여기고 그런 사랑의 수혜자가 되기를 젊은 시절 학수고대하지 않었던가. 재력을 가진 남성과 엄청난 미모를 가진 여인의 사랑을 받는 게 최대의 행복이며 축복이고 복 많은 사람이라고 세뇌당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씁쓸해진다. 그런 드라마에 빠져 설렘을 느낀 경험이 나 또한 적지 않으니까 말이다. 물론 독서를 하게 되면서 예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게 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 시청하지만 말이다. 



밀란 쿤데라가 언급한 세명의 작가들의 사랑 옹호에 일침을 가하는데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지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괴테와 베티나의 스캔들에서 감정의 원천은 베티나이다. 그 감정을 자신의 불멸을 위해 그녀는 어떻게 만들어 냈는가이다. 그녀는 신이 괴테를 향한 사랑을 신이 내린 계시라고 믿는다. 우리도 사랑하는 감정을 느낄 때 '운명' 혹은 ‘신의 장난'이라고 하지 않는가. 베티나도 역시 그럴 수 있다고 쿤데라는 말한다.
 

베티나의 가슴에 사랑을 심은 이는 그녀보다 높고 괴테보다 높은 이다. 신이거나 아니면 릴케가 말하는 그 천사들 가운데 어느 하나인 것이다. 얘기가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괴테를 옹호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이(신이건 천사건)가 베니타의 가슴에 어떤 감정을 심었다면 그녀가 그 감정에 복종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괴테의 가슴에는 그런 감정을 심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게다가 예고조차 없이 부과된 숙제에 대해 반발했다고 해서 어찌 릴케가 그런 괴테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의 감정은 철저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다.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온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 진리를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이 <불멸>을 읽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나 또한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독서를 하면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분노의 감정 역시 타인이 행동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저장된 무의식적 내 몸이 기억이 분노 감정의 에너지로 발현된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화를 낼 것인가. 아니면 참는 것이 답인가. 참는 것 또한 하나의 감정 상태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 주어진 상황을 파악하고 통찰한 뒤, 올바른 대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무 이득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머리로 이해되나 실천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내 감정 상태를 스스로 인지하고 깨어 있을 수 있다면 개선될 수 있으리라. 다시 베티나의 사랑에 대한 쿤데라의 생각을 들어보자. 
 

베티나가 '진정한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그런 '관계'-'사랑'이 아니라  감정-사랑이다. 어떤 천상의 손길이 인간의 영혼에 피우는 불꽃, 사랑하는 이가 손에 들고 "온갖 것으로 변신하면서 애인을 찾는" 횃불 같은 것이다. 그런 사랑(감정-사랑)은 부정(不定)을 모른다... 대상이 바뀔지라도 사랑은 여전히 똑같은 하늘의 손길이 피운 똑같은 불꽃으로 남는 까닭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면, 이제 우리는 어째서 베티나가 그렇게 많은 편지를 쓰면서도 괴테에게 질문을 거의 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이 괴테 같은 인물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의 모든 책들에 관해서 물어볼 수 있을 것이요... 유럽에 관해서, 그리고 과학 기술에 관해서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베티나는 괴테와 토론하지 않았다... 우리는 괴테에게 쓴 베티나의 방대한 편지에서 그런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녀가 품은 사랑의 동기와 의미는 괴테가 아니라 바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베티나의 사랑은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는 순간에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감정은 과시, 보여주기식 사랑이고 철저히 자신이 기억에서 만들어낸 창작물일 뿐이며, 사실 여부와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 군상을 쿤데라는 '호모 센티멘탈리스'라고 정의한 것이다. '감정을 가치로 정립하는 인간', 콩깍지가 눈에 끼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감정 과잉에 빠진 상태 말이다. 이 '호모 센티멘탈리스'를 넘어 사실 쿤데라는 '호모 히스테리쿠스'로 4부의 제목을 붙이고 싶었던 것 같다. 
 

감정이란 우리 몰래, 그리고 대개는 우리 육체를 거스르면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우리가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는 순간부터(둘키네를 사랑하기로 결심한 돈키호테처럼, 우리가 그것을 느끼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감정은 더는 감정이 아니라 모방이요 감정의 과시다. 그것을 사람들은 흔히 히스테리라고 부른다. 그래서 호모 센티멘탈리스(다시 말해서 감정을 가치로 정립한 사람)는 사실 호모 히스테리쿠스와 같다.

 

중요한 것은 감정 과잉의 상태가 자아 팽창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이성적 사고를 하는 생각만으로는 자아를 구별하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고 상대방의 생각을 내 것으로 취하기에 이것으로는 너와 나가 다르다고 분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감정이 이와 다른 점은 이것이 나만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감정이란 것이 결국 너와 나를 구별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자아가 실재한다고 우리가 믿게 되는 씨앗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발을 밟는 다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다.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김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것이다. 고통을 당할 때는 고양이조차도 상호 교환이 불가능한 자신의 유일한 자아를 의심할 수 없다.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세상은 흔적 없이 사라지며, 우리들 각자는 자지 자신과 홀로 남는다. 고통이야말로 자기 중 심중의의 위대한 학교인 것이다.  

 

 
감정 과잉은 자아 팽창으로 이어지고 때로는 이것을 아름다운 영혼으로 결부 지어 위대한 가치로 정립하면서,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혼의 팽창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작가의 방점이 있다. 쿤데라는 자신의 나라 체코의  정치 상황이 자신의 글에 영감의 토대가 되는 듯하다.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마치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정치슬로건에 대한 폐해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그랬지만 <불멸>에서도 보여준다. 베티나의 사랑의 감정과 혁명가의 마음 상태는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스무 살에 공산당에 가입하는 소년이 손에 총을 들고 게릴라에 합류하러 산속으로 가는 소년은 혁명가라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에 매혹되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주먹을 들게 하고 총을 잡게 하고 정당한 혹은 부당한 명분을 옹호하도록 자극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이상 팽창된 영혼이다. 바로 이것이 '역사'의 모터를 돌아가게 할 수 있었던 연료요. 이것이 없었다면 유럽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을 권태롭게 바라만 보았을 것이다.

 
한 개인의 마음 상태가 세상에 파장을 미친다는 밀란 쿤데라의 견해는 나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에 도달한다. 내가 모르는 사람의 불행도 결국 내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 두고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욕망과 집착이 세상을 파괴시키는 힘을 발동시킨다는 것을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은 '세상이 어지러운데 나만 잘살면 되는 문제냐'에서, '나부터 잘살아야 세상이 좋아진다'는 위대한 영혼들의 말씀을 다시 새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