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노인과 바다 (feat. 과정의 소중함)

Christi-Luna 2025. 6. 25. 13:41

너무나도 유명한 고전 소설 <노인과 바다>는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데 기여한 작품이다. 미국식 영웅 스토리와 인간 삶의 여정에 관한 근원적 통찰이 묻어있는 작품으로 성공과 패배, 진정한 명예는 무엇인가? 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노인이 청새치를 잡은 뒤, 이것을 지키기 위해 상어와 사투를 벌이는 상황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과 패배의 근거와 기준이 무엇인지, 그것을 막연하게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부분에 관한 문제의식을 일깨워 준다.
 
주인공 산티아고는 쿠바섬에서 부인을 잃고 혼자 사는 어부이다. 그에게 친구이자 아들 같은 마놀린이라는 소년이 늘 산티아고 곁에서 그를 따르고 보살펴 주기도 한다. 산티아고는 고기를 84일 동안 잡지 못해 어부로서 자신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마놀린에게 자신이 운이 다했다는 말을 전할 정도로 미안한 마음도 품고 있다. 85일 되는 날, 마놀린의 도움을 받아 노인은 홀로 먼바다로 나간다. 드디어 엄청난 크기의 청새치가 낚시 미끼에 걸려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노인은 이 고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한다. 며칠이 지나고 지칠 대로 지칠 즈음 노인과 마찬가지로 힘 빠진 청새치는 수면 위로 몸을 드러내고 노인은 작살로 고기의 배 옆구리를 찌르고 고기를 잡게 된다. 그런데 이 죽은 청새치에서 흘러나온 피는 상어 떼를 불러들인다. 또 다른 전쟁을 치르게 된 노인은 청새치를 지키기 위해 맹렬히 상어들과 싸운다. 청새치의 마지막 고기 한 점을 남겨두고 더 이상 상어와 싸우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내려놓는다. 뼈만 남은 청새치와 함께 노인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간다. 노인은 소년의 도움으로 기력을 되찾고 바다에 다시 나갈 사자 꿈을 꾼다.


노인은 청새치를 잡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잡는다. 하지만 그 꿈은 잠시 상어 떼가 그의 희망을 앗아버린다. 상어의 공격으로 뼈만 남은 청새치는 결국 쓰레기에 불과한 결과를 남긴다. 마지막 뼈만을 본 사람들은 노인이 그 청새치와 상어와 어떤 사투를 벌였는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다시 사자를 꿈꾸며 바다를 나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그에게는 어부로서 고기를 잡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자신을 잘 알고 스스로를 믿고 있으며, 고기를 잡기 위해 요구되는 끈기와 상황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몸으로 익힌 기민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바다를 사랑하고 자신이 그 바다의 일부라 생각하며 거기에 모든 것은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형제로 바라본다. 바다는 인간 세상의 축소 판이며 신적인 존재임을 그는 알고 있다. 냉혹하지만 안전하고 잔인하지만 인자하고 거칠지만 아름다운 바다는 "신" 그 자체임을 노인은 간파하고 있었다.
 
<노인과 바다>를 보면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연상 되었다. 두 주인공의 나이가 50대라는 설정과 구도자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모험 같은 여정이 무척이나 닮아있다. 무모해 보이는 패기, 용기, 도전 정신, 주변을 살필 줄 아는 따뜻한 마음, 수행자와 다를 바 없는 절제심, 한결같은 마음을 두 사람은 가지고 있다. 노인은 작품 후반 상어와 혈전을 벌이지만 마지막 한점 남은 고기를 지키기에, 자신이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집념을 내려놓는다. 아마 고기를 지키겠다는 자신의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면 노인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돈키호테>도 마찬가지다. 기사가 되기 위한 것도, 둘치아네를 향한 사랑의 집착고 결국에 내려놓는다. 그 집념을 끝까지 몰고 가지 않고 순응하는 면모가 두 사람이 닮아있다. 아마 포기했다기보다, 처한 상황을 직시할 줄 아는 감각을 지녔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노인이 청새치를 온전하게 가지지 못했지만 그의 위대함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또 청새치를 바다 멀리서 잡아 그것을 자신이 사는 곳으로 가져와 팔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을 반성하며 스스로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가졌다고, 그것이 삶의 완성이 아니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대학입시나 고시 합격 같은 결과가 있다고 착각 속에 산다. 우리가 어떤 일을 달설하기 위해  대부분은 그 결과물에 초점을 맞추고 타인의 평가도 그 결과물로 한다. 그 평가에 연연하고 안달복달하며 그 목표를 향한 “과정”은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인내하고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정의 가치”를 모르고 두려움에 휩싸여 “과정 자체를 집중” 하지 못하고 즐길지도 모른다.

“과정을 즐긴다는 말”을 젊었을 때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과정에 헌신하는 것이 결국 그 목표를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노인도 대어를 잡는 것이 꿈이었지만 청새치를 잡고 상어로부터 그것을 지키기 위한 “과정”은 예술에 가깝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노인이 고기를 잡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사투의 과정“은 이 소설의 정수다. 청새치를 잡았을때 결과가 주는 일시적인 기쁨은 잠시, 상어의 공격으로 뼈만 남은 청새치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허무한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과 자체만을 가지고 얘기하는 세상 속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사자꿈을 꾸는 노인에게, 삶의 보석 같은 가치가 무엇인지, 또 청새치를 잡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인이 상어와 벌인 혈전 과정에서 우리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흔히 말하는 결과물은 어디가 끝인지 실제로는 알 수 없다. 엄청난 크기의 청새치를 노인은 잡았지만 그 결과물을 지켜내기 위해 상어 떼라는 더 큰 고통을 직면하고 된다.

우리가 원하는 목표치를 이루고도 그 기쁨은 잠깐, 그 결과를 유지하는데 또 다른 노력을 하거나 이전보다 더 좋은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큭다. 결과라는 것은 끝이 없다. 어쩌면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것이 진정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종착역인 것이다. 그때까지 사자꿈을 꿈을 꾸고 과거의 경험을 벗 삼아 노인처럼 다시 바다로 나갈 것이다. 이렇게 “삶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살아갈 뿐, 결과는 공평하게 다 같이 죽음을 맞이하고, 청새치의 뼈처럼 바다의 쓰레기가 될 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과정의 소중함과, 결과에 대한 일시적 행복 중, 어디에다 방점을 두고 살 것인지 그 길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삶의 혜안을 지닌 헤밍웨이 정작 본인은 무엇에 절망하고 좌절했길래 자살을 선택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작품의 훌륭한 메시지가 작가 자신의 삶에 녹여내어 연결되지 못했다는 점, 참으로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