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록

요셉과 그의 형제들 & 티벳 사자의 서

Christi-Moon 2023. 8. 27. 06:16

토마스 만이 독일 소설가이지만 그의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불교 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벌릴 수가 없다. 성경과 불교 공부 둘 다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경의 나오는 이야기들과 불교에서 얘기하는 방향성이 거의 유사하다고 말한다. '아'와 '어'가 다른 것 같아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이 <요셉과 그의 형제들> 첫 초반 이야기도 그런 생각을 굳혀준다. <파우스트 박사>에서도 다르지 않았지만,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읽는 초반에 갑자가 <티벳 사자의 서>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독서를 하면서 가끔 이렇게 전혀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가 떠올라 충동적으로 찾아볼 때가 생기곤 한다. <티벳 사자의 서>는 죽음에 다다른 그 순간에 죽어가는 영혼들이 뭔가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 사후 세계는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리고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그런 선택이 가능한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 속 죽음 후의 이야기가 궁금했고 왜  이 책이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으면서 갑자기 읽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들었는지 나로서도 의문이다. 아마도 소설 초반 이야기 전개가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있으며, 동시에 조상들이 가진 영혼의 영속성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인해 이 <티벳 사자의 서>가 궁금했나 보다. 소설 속 주인공 요셉의 생각들이 과거 조상들의 피가 자신에게도 흐르고 있음을, 그리고 그 영혼들이 동일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글의 전개는 '창세기'를 바탕으로 한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라고만 치부해 버리기에는 사실적이고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인간 세상은 결국 과거와 쭉 하나로 이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 전과 유사한 방식으로 세상이 움직이며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세상의 이치임을 알게 되었다. 단지 동일하게 현상이 나타나지 않지만 그 본질과 근본은 다르지 않기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근간은 변화지 않고 그 안에서 변형과 변화 속에 지속되고 반복된다는 것을 말이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도 여럿 있었지만, 이들 중에서 시간과 육신의 조건을 엄격하게 구분한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만물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태양 아래서 자신의 현존재를 과거의 존재와 정확히 구별하여 자신의 '개성'과 이전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이사악 그리고 야곱의 개성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긋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이름은 대물림된 것들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 이름들이 번번이 등장하는 공동체에 '대물림'이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혹은 그럭저럭 맞아떨어진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예전에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이 반복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체험은 그 옛날의 일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처럼 과거의 일이 눈앞의 일로 비중 있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일을 야기한 상황이 언제 어느 곳에서나 현실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물림'이 <파우스트 박사>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동일성의 비밀'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 왜 우리는 이해하고 있었야만 할까? 왜 토만스만은 끊임없이 이런 이야기를 글을 통해 말하는 것일까?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와 통찰이 결국 과거에서 얻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우치게 만들고, 미래의 삶을 방향성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해 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과거를 통해 인간이 예측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과거의 삶에 우리는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토마스 만의 말처럼 과거의 기록은 "미래의 사람들이 지혜의 씨앗으로 삼을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노아의 방주처럼 "이러한 재난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반드시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고 있다.  
 

우리의 관심거리는 숫자로 확정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설화와 예언이 혼동되는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과정을 통해 시간이 극복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언제가'라는 단어이다. 이 낱말에는 과거와 미래, 이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 있어서 언제든 현실이 될 가능성을 내비친다. 바로 이것이 재구현이라는 발상의 뿌리다.

 
위에서 말한 "신비로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고와 관점의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고 깨달음일 것이다. 세상의 속박으로 벗어나, 이제껏 자신의 내면에 감춰졌던 무의식을 이해하고 익숙했던 관습과 정해준 틀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승리'의 길로 가는 길이 되어줄것이다.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의 형제들>은 아직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씨앗 같은 형태로 잠자고 있던 우리의 의식의 세계를 끄집어내서 밝혀 주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자라도록 따스한 햇빛이나 물과 같은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참으로 책은 고마운 존재이다. 흩어져 있고 정리가 되지 않아,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니까 말이다.

 



책이라는 것은 삶의 비밀이 담긴 보물 상자와 같다. 그것을 열기 위한 열쇠들이 곳곳에 숨어있기에 열쇠를 애써 찾아야만 한다. 그 다음 상자에 맞는 열쇠로 하나씩 둘씩 열어보면 그 안에 각기 다른 보석들이 나를 향해 자신을 가지라고 유혹한다. 각기 다른 보석 상자들을 열다 보면 삶의 방향성이 어제보다 명료해지고, 삶의 여정에  혼선을 막아주는 든든한 안내자가 되어준다.


우리들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왜 나는 이곳에 육신을 갖고 태어났는가?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탄생은 왜 있으며 죽음은 왜 있는가?" 이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이다... 칼 융 박사도 이 책의 독특한 가치를 인식하고 "... 이 책에서 새로운 생각과 발견을 위한 많은 영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근본적인 통찰력을 얻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가 잊고 있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곧 생과 사의 문제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게 하는 일이다.

 
나에게 책은 소중한 친구이자 스승이 되었다. 토마스 만이 나에게 그런 사람이다. 이토록 토마스 만의 마력에  빠져드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고, 그의 작품에서 뭔가 내가 알아내고 싶은 탐구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막연한 마음과 희미한 의식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글로 설명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역시 책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 생각의 실체가 무엇인지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 나 자신을 더 이해시켜 주었다. 내 삶에 궁극적으로 필요했던 질문이 토마스 만의 작품 속에 그려져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책에서 얻을 답에 대한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위의 글을 통해서  나 자신의 불 투명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티벳 사자의 서> 해설을 쓴 에반스 웬츠의 글과 심리학의 거장 칼 융이 언급함 말이다. 내가 어디서 나왔고, 어디로 갈 것인지 나라는 자의식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은 의지와 그 죽음에 대해  좀 더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으며, 그 죽음을 기꺼이 받아 들 일 수 있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싶다. 긴 호흡으로 읽고 있는 토마스 만의 요셉 이야기를 통해 '나'라는 인간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나'라는 '자아'를 해체시키는 힘을 기르고 실행에 옮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