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듯하다. 가르치면서 얻을 수 있는 세상의 가치 명예 성공 명성을 떠나서, 나도 바로 서있지 않는데 다른 사람을 바로 서라고, 바른 생각과 행동을 하라고 알려주는 것은 불교적 용어로 "구업"을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공을 가르치기 시작한 일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갈수록 산 넘어 산이라는 생각이 들고 뭔가 뭐를 답답함이 올라온다. 이게 내가 가야 할 길이 맞는지 이 일로 내가 돈을 버는 것이 옳은 것인지, 회의가 밀려온다. 이 저항감에 대한 실체를 바르게 인식하고 제거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떤 일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자기 수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르치는 일도 하나의 고행이고 더군다나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니 더욱더 그러하다. 거의 '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데 '신'은커녕 나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욕심이고 욕망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부터 반성하고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의 답답함 자체를 가지며 일을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늘 하기 싫지만 결국 하고 말 것에 대한 저항감을 가지지 않고 기꺼이 하려는 마음 가짐을 지녀야 한다. 그러려면 위대한 영혼들이 일관되게 말하는 "자아해체"... 이것이 필요하다. '내 것'이 옳다. '내 것'을 그대로 따르라. ‘내 것'을 따르지 않으면 망한다. 이런 자의식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지독하게 이것을 내려놓기 힘들다. 아마도 이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이것에 자유로워지기 어렵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요즘 더 힘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보다 나는 ‘ego'가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독서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맞고 남이 틀리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데 '가르침'은 일단 내가 옳다는 '자의식'에서 출발하지 말아야 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가르침'은 사실 지금 현실로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하나를 구축하기 위해 요구되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좋은 '배우'를 길러내기 위해 그에 맞는 티칭을 하는 것은, 자본주의 안에 배우를 필요로 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어, 그 시스템에 투입되어 쓰이기 좋은 사람이 되도록 알려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연기 선생(acting coach)라고 부른다. '선생' ‘스승‘이라는 영역은 뭔가 영적인 것을 넘나드는 신성한 차원의 세계를 추구하는 그 무엇인 것처럼 '추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한 인간을 적응시키는 훈련자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물원에 동물을 우리에 가두고 인간들을 구경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길들여 주면서 돈을 버는 조련사와 다를 바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일에 대한 희의와 저항감이 크게 다가온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과정에서 동물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없다면 진정한 조련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좋은 '배우'를 키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어떻게 설정해서 그 방향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배우'라는 직업은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과 정서에 '공감'하는 것이다. 이 '공감'하는 과정 자체가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쾌감 혹은 카타르시스를 준다. 또 관람자에게도 배우 본연의 모습과는 또 다른 사람을 보는 것에 대해 재미와 전율을 느끼게 해준다. 상호 작용으로 그 전율에 대한 에너지를 다시 배우도 느끼고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더불어 거창하지 않지만 세상을 움직였다는 힘까지 느끼게 된다. 그것에 대한 만족감으로 충만해진다. 그것의 결과로 물질적 대가가 따를 때 더욱더 일을 잘하고 있다는 능력자로서의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이런 배우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합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 이외에 좀 더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에 힘을 보태주는 역할을 조금이나마 하고 싶은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배우의 연기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위로가 될 수 있는 능력자를 기르는 것도 선생이 해야 될 몫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르침을 받는 학생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들어가서 돈을 벌고 명성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결과물은 ’신’의 역할이지 ‘연기선생’의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이 ‘신의 영역’까지 나는 넘보고 그것을 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가끔 힘들어하면서 일을 그만두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배우'라는 직업은 타인에게 노출 빈도가 높아야 한다. 특히 이 치열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돈과 늘 직결되어 생활하기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 그래서 배우는 대중에게 노출 빈도가 높지 않게 되면 딱 굶기 좋은 직업이다. 그래서 선생으로서 이것을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것들은 가르침의 결과물이다. 이 결과물까지 가르침을 받는 이에게 해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선생님'이 되면 좋겠지만 역부족이다. 여기까지는 내 길이 아니라고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는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라는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위로가 되어 타인의 삶을 충만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이런 치유와 위로를 주는 힘이 곧 동시에 자신의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전해주고, 그들이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 이것까지 선생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럼 이것을 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으로 가르침의 방향성을 잡아야 하는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고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직업의 가치관을 지니게 하기 위해서 선생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하나로 귀결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공감력을 키우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크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미약할지라도 세상을 밝게 만드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이것이 ’ 가르침‘의 정수이다. 이런 조력자가 되기 위해서 선생 자신의 성찰과 수행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선생인 나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힘, 이것이 우선적으로 길러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지속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나부터 선생으로서 남의 평가, 세상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지혜의 힘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비하도 아니고 자뻑도 아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학생)을 점검하기 전에 나 스스로(조력자)를 점검하고 돌아보며 반성해야 한다. 결국 누구를 가르치는 일은 선생으로서, 선생 자신의 ‘자기 수행’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직업이다. 사실 어떤 일이든지 맡은 일을 잘하고 싶으면 ’ 자기 수행‘은 불가피할 것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를 무리하게 드러내는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God'은 알고 있다. ‘신’은 지켜보는 감시자로 내 안에 있고 나 자신이므로 내 생각과 행동을 늘 지켜보고 있다. 나에 대한 진정한 평가와 판단은 ‘신’이 하는 것이다. 즉 ‘나 자신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수행하면서, 나 자신을 잘 아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고 나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아주 작은 것도 무시해서도 안된다. 예를 들어 커피 두 잔이 수면의 질에 방해가 된다면 한 잔으로 줄여야 한다. 사소해 보이지만 내 몸에 좋지 않은 작은 욕구부터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쌓여 나를 바꿀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을 가르쳐,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길 것이다. 나부터 바꾸자. 나를 검열하고 고쳐나가자. 혁명은 가르치는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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