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기록

뮌헨 4 (feat. 요제프 보이스)

Christi-Moon 2023. 11. 5. 16:59

나라마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남다른 예술가들이 있다. 여행을 하면서 좋은 점은 내가 모르던 예술가들을 한 둘 씩 알아가는 과정도 여행에서 얻는 기쁨 중 하나이다. 이번 뮌헨에서 새롭게 재발견한 아티스트는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와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이다. 오늘 정리해 보고 싶은 작가는 ‘요제프 보이스’이다. 요제프 보이스의 작품들은 뮌헨의 '렌바흐 시립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고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에 몇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La rivoluzione siamo Noi, 1972


주로  서양 회화에만 관심이 많았던 나는 회화 중심이 아닌 조각가 설치 미술가, 행위예술, 조각 작업을 한 요제프 보이스의 전시된 작품을 보고 신세계를 느꼈다. 그의 작품은 눈으로 보이는 심미적인 작품을 추구하기보다는 눈으로 읽을 수 없는 세상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열정이 느껴져서 좋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영적으로 이해하되고 설득되는 에너지와 감각이 요구된다. 눈이 아닌 영적인 그 무엇으로 느껴지고 이해되는 그런 차원의 것이라고 할까. 요제프 보이스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관람자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501 위대한 화가>에 나오는 그의 작품 세계를 읽으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략적인 맥락을 잡아 보았다.
 

요제프 보이스는 지난 40년 동안 미술계에 많은 영향력을 끼쳐왔다. 의례적인 공공 퍼포먼스 시리즈로 유명해진 그는 미술 치유력과  인간 창조력의 구제 능력을  끊임없이 옹호했다... 미술은 '낡은 사회 구조의 억압적인 면을 제거할 수 있는 진화적이고 혁신적인 유일한 힘"이라고 주장했다. 아마도 미술에 관해 유토피아적인 시각을 지닌 최후의 미술가일 것으로 생각되는 보이스의 성취들은 여전히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는 정치와 사회 문제를 항상 미술과 연관시켰다..."모두가 미술가다."라는 슬로건으로 잘 알려졌듯이, 그는 전체 사회를 거대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인간의 창조력을 옹호했다. 그는 누구든 모든 직업에서 잠재적 창조자로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모든 삶의 형태를 예술 작업의 일부로 생각하였다. 이 확정된 미술 개념은 이간의 활동 규범을 체계화하는 계급 제도와 관습적인 틀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The End of the 20th Century, 1983

 
알테 피나코테크 모데르네 전시되어 있던 <20세기의 종말>은 요제프 보이스 말년쯤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거대한 돌들을 배치한 이 작품은 전시실 한 곳을 다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을 보면서 느낀 생각들은 마치 이 돌들이 사람이 모여 있는 것 같았으며, 그래서 공동묘지로 보이기도 했다. 개성 넘치는 인간 군상이라기보다는 획일화된 개인이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슬픔과 고통을 안고 무리 지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돌들 각각에게서 내면의 고립감이 느껴진다. 이 전시물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죽음, 아님 지구의 종말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 돌 무리 중앙쯤에 유일하게 똑바로 서있는 돌이 하나 있다. 다른 돌처럼 쓰러져 있지 않으려는 듯 고집스럽게 외로이, 새로운 탄생과 변화의 시점을 알리기 위해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돌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차갑고 거친 삶, 그리고 죽음과 탄생을 이어가는 거룩하고 신성한 신전으로 다가오는 전시물이었다. 
 
 

*Fish, 1964

 
렌바흐 시립 미술관에 전시된, 1964년 제작된 "Fish"는 소금으로 말려 흰색으로 칠한 대구 한 마리를 걸어놓은 작품이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작품화한 "샘" 또한 할 말을 잃게 만들지만 이 작품도 그것 못지않게 어이가 없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관람자로 하여금 주저하게 만드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스페인에서 많이 먹는 대구 요리를 먹으면서 영감이 떠오른 것일까?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흥미롭게만 보기에는 처량하고 슬픔을 자아내는 묘한 매력이 묻어있다. 왜냐하면 고문받으며 매달려 있는 인간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죽어서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날갯짓을 멈추고 있지 않은 '한 마리 새' 같기도 하고 박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완전히 죽어있지 않고 곧 부활할 자세로 작은 희망도 담겨있다. 예술가가 하나의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은 놀랍다.
 

*Bathtub, 1960

 

렌바흐 시립 미술관에서 "Fish" 다음으로 오래 머무르게 한 작품은 "욕조(BATHTUB,1960)"이다. 흰 욕조가 그야말로 상처 투성이다. 이것을 보고 있자니 피 흘리고 부상당한 환자들이 많이 있는 병동이 연상되었다. 욕조에 붙인 반창고가 핏빛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 그래 보였다. 그 욕조 끝에 매달린 수도꼭지는 마치 유명무실한 남자 성기를 상징화한 것 같다. 녹까지 슬어 수돗물이 흐르는 역할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수도꼭지이다. 아니 그 꼭지는 괜찮지만 주의에 상황이 그것을 받쳐주지 못하는 것으로도 느껴진다. 군데군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반창고가 붙어 있지만 그야말로 만신창이 된 몸체가 치유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육체가 만신창이 되었다기보다는 정신이 만신창 된 것일 수도 있다.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몸에 상처가 많다기보다는 마음의 상실감이 깊어 치유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Show Your Wound, 1974/75


또 하나의 상처 흔적이 묻어있는 작품은 “당신의 상처를 보여줘(SHOW YOUR WOUND, 1974/75)"이다. 부상자와 시신을 운반하는 병원 침대가 눈에 들어온다. 위 벽면의 검정 나무판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장례식장을 연상시키고 묘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전시물은 누가 봐도 죽음을 연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을 치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실과 결국 죽음에 이르는 인간 삶에 대한 공허함 허무감이 이 전시물의 공간 여백에서 전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살면서 삶의 균형감을 찾는 것은 어렵다.  늘 극단의 선택을 해야 하고 이분화된 세상에 던져져 있다. 결국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런 곳에서 얻은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 수 있다. 이 공간에서 연상되는 삶의 전쟁터는 침묵의 외침으로 아우성친다. 그래서 더 가슴 아프다. 결국 죽음만이 삶의 평정과 평화를 건네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죽음을 애도하는 위 벽면에 걸려있는 검정 나무판만이 작품 속에서 중심의 축을 잡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평정심과 균형감을 가지기 위해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상처는 자신만이 알고 있어 고독하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상처를 대신할 수 없다. 설사 그것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해고 우리의 상처는 죽음에 의해서 혹은 그 죽음을 인식하고 살아갈 때 비로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인식하고 살아가려는 의지는 삶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Felt Suit, 1970


요제프 보이스와 대한민국의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백남준 작가와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보이스와 백남준은 동료 예술가로서 한 공간에서 작품을 함께 전시했으며 독서력이 둘 다 대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서로의 정신적 교감이 특별했다고 전해진다. 1986년 세상을 떠난 보이스를 위해서 백남준은 그를 애도하기 위해 <보이스 목소리 Beuys-Voice, 1990>를 제작했다고 하니 이 두 예술가의 우정의 깊이가 짐작이 간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읽는 힘은 삶을 살아가는데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제는 독서와 여행을 하고 싶은 이유가 이런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볼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만 함몰되어 중심 없는 삶을 살다가고 싶지 않다. 위대한 영혼들이 내는 한결같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읽어내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힘을 기르고, 더 나아가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여행을 하면서 이런 영혼들을 알아가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위대한 영혼들이 만들어낸 작품 속에 숨어있는 영적인 힘은, 알아채기 어려운 세상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드러내서 그 세계를 밝게 인식할 수 있도록 가이드해 주기 때문이다. 교감과 소통이 항상 직접적인 만남과 대면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영적인 힘이 투명 밧줄에 달려있어 그것을 알아보고 잡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제 놓치고 싶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이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