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대화란 무엇인가 (feat. 요셉의 자기 수용 감각)

Christi-Moon 2024. 4. 13. 15:54

<대화란 무엇인가>의 저자 데이비드 봄은 1917년 유태인 부모밑에 태어나 아인슈타인과도 친밀하게 학문적 교류를 가지기도 한 현대 물리학에 한 획을 긋는 과학자이다. 양자 역학을 통한 그의 뛰어난 통찰은 종교, 심리, 사회과학, 정치등 세상의 모든 학문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입증하려 애썼고 인간이 가장 본질적으로 인식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을 명쾌하게 제시해 주었다. 그것을 위해 여러 종교 지도자와 만나 교류하며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힘썼고, 인류가 하나라는 연대의식을 지니며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데이비드 봄의 책을 읽으면서 "지식인의 책무"를 지니고 살아간 "성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벨 물리학상을 넘어 노벨 평화상을 그가 받지 못했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다. 인간세상에서 주는 ’상(prize)'은 한 사람의 능력과 영혼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그의 위대함은 서양 과학이 주도하는 세상에, 이미 오래전 동양 철학에서 양자 역학과 다를 바 없는 사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대중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노력한 유대인이라는 점이다. 물론 아인슈타인도 불교는 과학이라고 얘기했다고 하지만, 과학과 동양철학의 연관성에 관한 통찰을 대중화시켜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사고’의 중요성에 대한 성찰을 한 과학자는 봄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세상의 "상(prize)"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처럼 한 인간의 가치는 인간들이 평가하는 서열 순위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사고"에 우리는 보다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언어적 사고로 확인되지 않는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 가에 대한 봄의 심도 있는 연구는 특별하게 다가온다.
 
내가 충동적으로 쉽게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성찰할 수 있었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에서 요셉이 형들에 의해 우물(굴) 속에 빠지고 난 뒤 요셉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성찰한 부분을 읽고 난 뒤부터, 과거의 나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말하고 싶어 안달 나고 충동적으로 한 행동들이 얼마나 내 삶을 갉아먹었는지 데이비드 봄의 <대화에 관하여>를 읽으며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과거 경험을 통해 인식된 습관적인 생각과 감정들을 조절할 수 있는 힘에 대해 데이비드 봄은 ‘유보', '관찰' '자기 수용 감각'이 필요함을 알려준다.
 

자신이 공격적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다만 자신이 옳다거나 공격을 당했으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마땅하기 때문에 공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그는 상황을 알아차린다... "나는 지금 공격적이야. 이러면 안 돼" 그런 판단이 자신의 의지를 누르며 공격적인 행동을 억제하지만 그는 여전히 공격적이다. 공격적인 행동은 사라졌지만 그의 공격성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다른 반응도 가능하다. 공격성을 행동을 유보한 채로 내면에서 공격성이 드러나도록 펼쳐두고 그것의 실질적인 모습을 들여다본다. 우리 내부에서는 갖가지 움직임이 일어난다. 심장 박동과 혈압, 호흡 방식 등이 달라지고 긴장감이 고조되는 것이 신체 감각을 통해 느껴진다. 이런 느낌과 함께 사고도 진행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모든 움직임을 관찰하고 인식하고 이들 사이의 연결을 파악한다... 유보와 관찰을 통해서 연관성을 인식함에 따라 사고도 전체 과정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진다.

 

데이비드 봄은 이 ’유보'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가 비록 '유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지만 이것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즉각적인 충동에 따라 반응하는 성향으로 자신도 모르게 진화해 왔다고 말한다. 폭력이 나쁘다는 사회적인 약속으로 인해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억누르지만 이 억누른 폭력성은 결국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어떤 식으로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분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억압은 또 다른 방식의 폭력성으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미카엘 하네케 영화를 보면 이해가 된다. <하얀 리본>에서 목사는 자신의 종교적 가치관을 잣대로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이 폭력성은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아이들의 또 다른 폭력적 행동으로 분출된다. <피아니스트>에서도 딸을 성공한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한 엄마의 욕망과 집착은 딸이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큰 장애물을 가져다준다. 심각한 문제는 스스로  이런 것들을 인식조차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성이 사회, 더 나아가 국가 간의 갈등과 분쟁으로 이어져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봄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기에 개인과 개인의 대화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제껏 했던 대화 방식을 위해 개인의 사고(thought)하는 방법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봄은 강조한다.


인간은 신체 한 부분을 움직이면 스스로 그것을 알아챌 수 있기에, 외부적인 힘에 의해 자신의 몸이 움직였을 때 이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신경 시스템을 봄은 ‘자기 수용 감각'이라고 말한다. 신체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 기능이 가능하지만 ‘사고’는 자기 수용 감각을 작동시키기가 매우 힘들기에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사고’를 관찰할 방법을 터득해야 된다고 한다. ‘사고’하는 과정 속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면 심각한 상황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을 스스로 직시해야 된다는 것이다.
 

사고는 어떤가? 일단 먼저 생각하려는 충동이 생긴다. 이어서 사고가 발생하고 감정이 생기고 모이 긴장하는 등 뒤따르는 많은 결과가 나타난다. 만약 우리가 충동과 사고 결과 사이의 연관성을 보지 못하면...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서 이런 생각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정말 꼴불견이야. 참을 수가 없다니까." 그런 사고는 굳이 말로 할 필요 없이 거의 저절로 생긴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무시한 사람을 생각하면 감정이 격해질 수 있다. 그런 경우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강렬한 느낌이 오는군. 분명해." 이런 상태 자체가 사고에서 가지는 수용감각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자신이 처한 상황의 혼란스러움을 잠재우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곤 하는데,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특정한 감각이 요구된다고 봄은 주장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되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는 ’자기 수용 감각‘을 작동시키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 생각하려는 충동이 일었고 뭔가를 생각했어 그리고 화가 나는 느낌이 들었지. 그렇게 해서 생긴 감정이야. 그것뿐이야." 만약 우리가 생각에서 비롯되지 않은 감정을 갖는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인식한 것으로 암묵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에서 봄이 이야기하는 ’사고의 과정‘이 형들에 의해 우물안에 빠졌을 때 요셉에게 일어난다. 요셉은 형들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기보다. 형들의 과격한 행동이 요셉 자신의 과거 행동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죽일 수 있었던 형들에 대해 요셉은 복수의 감정을 ‘유보’했고 자신의 자만과 교만을 '관찰' 했으며 이 모든 일이 자기로부터 출발했다는 ‘자기 수용 감각’으로 과거의 과오를 뉘우치게 된다. 이런 식의 ’사고 과정‘을 거쳐 부활한 요셉은 이집트 노예로 팔려가고 그 뒤 이집트 파라오에 버금가는 강력한 지도자로 거듭난다.

‘자기 수용 감각‘을 가지는 것이 쉽지 만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차 의식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봄의 말대로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생각들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심지어 그 행동 때문에 예상치 못한 결과로 개인과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 그는 인간 누구나 잠재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믿어야 하고 이것을 작동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유보‘ ’관찰‘ ’자기 수용 감각‘의 힘을 키운다면 개인간의 소통 방식에 긍정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류 평화에 기여할 것이다. 결국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위해 ‘사고’의 흐름을 향상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고, 성찰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타인과의 갈등으로 야기된 혼란을 줄이기 위한 대화는 올바른 ‘사고(thought)'의 과정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봄의 <대화에 관하여>을 읽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해 준 봄에게 감사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직시하고 변화시키며 살아가야 될것이다. 그 여정 가운데 늘 깨어있어야 하고 자만과 교만을 경계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됨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