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기만 (feat. 자연이 들려주는 이중주 )

Christi-Moon 2024. 7. 6. 17:41

토마스만의 중장편 소설 <기만>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앞서 읽은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이 미완성으로 끝나, 이 <기만>이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완결시킨 작품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만의 인간에 대한 통찰은 이전 글들도 그랬지만 <기만>은 더 날카롭고 함축적으로 파고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목부터가 그러하다. "기만"은 남을 속여 넘기는 의미를 뜻하지만 이 작품에서 "기만"은 타인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이는 기만', '자연을 기만하는 인간'에 대한 것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 라인강 변의 아름다운 녹지가 많은 뒤셀도르프, 십여 년 전 남편과 사별한 로잘리 폰 튀믈러 부인은 그녀의 딸 안나, 아들 에두아르트가 살고 있었다. 십 년 전 죽은 로잘리의 남편 폰 튀믈러 중령은 바람을 피우고 다녔고, 남편의 바람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살았다. 로잘리는 자연을 무척 사랑했고 천성적으로 사교적이며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로 나이에 비에 여성적 아름다운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그녀의 딸  안나는 어렸을 때부터 안짱다리로 태어나는 육체적 결함이 있었다. 반면두뇌는 명석하여 미술을 전공하였으며 그녀의 현대적 예술관은 엄마 로잘리가 원하는 바와 다르게 자연 자체를 그리기보다는 상징적이고 삼차원적이고 수학적인 세계를 그렸다. 로잘리는 아들 에두아르트의 영어선생으로 미국에서 온 켄 키튼을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캔을 너무 사랑한 로잘리는 자신의 자궁에 생긴 암으로 생긴 피를  생리로, 착각한다. 딸과 아들 켄트와 관람하러 간  홀터호프성에서  로잘리는 캔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캔도 받아들인다. 그와 며칠 뒤 약속해서 만나기로 한 장소에 로잘리는 가지 못하고 쓰러져 그녀의 생을 마감한다.


작품 속 로잘리와 안나의 대화들에서 묘사된 상반된 모녀의 시각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양 극단의 견해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이 매력을 토마스 만은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에서도 보여주는데 주인공 크룰을 통해 모녀를 바라보는 시각을 전달해 준다. 이 작훔 속 쿠쿡 교수 부인과 그녀의 딸 쑤쑤에 관해 느낄 수 있는 대비의 감정을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에서는 이렇게 묘사해주고 있어 흥미로왔다.
 

어머니와 딸-그것도 역시 감동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지요. 오누이의 관계. 좋지요.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커다란 매력을 종종 지니고 있지요. 하지만 모녀의 관계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 그것이 약간 열광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 이 지구라는 별 위에서는 누가 뭐라 해도 가장 매력을 풀기는 이중 영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젊은 사람만으로는 제가 생각하는 매력이 생겨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선호하는 것은, 짝을 이루고 있는 데서, 그러니까 어린이답게 활짝 핀 것과 위엄 있는 성숙함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에서 크룰은 싱싱하고 젊지만, 아직은 어려서 경직된 사고를 지닌 쑤쑤의 참신한 매력에 빠지지만, 반대로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이고 지성을 겸비한 연륜 지닌 쿠쿡의 부인에게도 큰 매력을 발견한 크룰은 부인과 육체적 관계를 먼저 맺게 된다. <기만>에서 로잘리와 켄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 맥락은 전작과 유사해 보인다. 전작은 크룰의 입장에서 모녀의 이중주를 표현했다면 <기만>에서는 두 여자의 상반된 관점에 대한 작가의 통찰을 자세하게 드러내 묘사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로잘리는 두 눈을 감고 오랫동안 꽃다발 속에 얼굴을 묻었다가 다시 고개를 들면서, 이것이야말로 천국의 향기라고 단언했다. 프시케가 등잔을 들고 잠자는 아모르 위로 고개를 굽혔을 때, 그녀의 콧속은 아모르의 입김과 머릿결과 빰에서 흘러나오는 이런 향기로 가득했을 터다. 따라서 이 향기야말로 천국의 향기며, 우리의 영혼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왕국에 오르면 바로 장미 향기 속에서 호흡하게 되리라고 로잘리는 생각했다. 그럴 때면 안나는 만약에 천국의 향기가 그렇다면 곧 익숙해져서 아무것도 못 느끼게 될 걸요,라고 회의적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로잘리 폰 튀믈러 부인은 물러서지 않고 연장자의 지혜를 내세웠다. 그렇다면 모든 행복이 다 그럴 테고, 감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행복도 행복임에는 틀림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 또 안나는 사과의  뜻으로 어머니에게 부드럽게 키스를 했고,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위 두 모녀의 대화에서,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제한하고 한정 지어 생각하게 만드는 문제점을  엿볼 수 있다. 글자 상으로 읽힐 때는 젊은 안나가 지닌 비판적 시각과 나이 든 로잘린이 경험한 삶의 세월에서 얻은 연륜이, 대비되는 관점으로 느껴지지만 두 여자의 사고는 언어로 형성된 생각의 틀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감각이 행복이라 여기고 이 행복이라는 감각에 익숙해져 지속되면 무감각하게 됨을 젊은 안나는 경계하고 있다. 행복은 늘 지속된 감각 속에 유지되어야 한다고 안나의 말처럼 우리도 착각하고 살아가는 오류를 범한다. 쾌락적 감각이 무뎌졌을 때 더 이상 행복한 느낌을 받지 못하게 되고 새로운 무언가를 갈구한다. 그러나 세월의 시간을 이겨낸 그녀의 어머니는, 감각적으로  느껴져야 행복하지만 감각으로 느껴지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을 누리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감각에 노출되어 익숙해지면 더 이상 그 감각을 느끼지 못할 뿐 아름다운 꽃 향기가 존재하는 한 그 행복은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아름다운 꽃의 향기가 영원할 수 있는가. 이 모녀의 시각은 행복의 지속성을 이야기 하지만 작가는 그 어떤 행복도 영원한 것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기묘한 일이 생겼다. 놀림거리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초지와 잠복 숲 사이를 걷는데, 갑자기 사향 냄새가 났다... 먼저 이 향기를 맡고 "어머나, 무슨 향기지?"라고 말한 사람은 로잘리였고 딸도 동의했다. 아마 사향 향수 정도의 향기가 틀림없었다. 그 향기의 근원지를 찾아서 몇 발짝 걸어가니 불쾌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그것은 길가에서 햇볕을 받아 들끓는 쇠파리들이 잔뜩 몰려 있고, 주위로도 쇠파리들이 윙윙 날아다니는 한 무더기의 배설물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쇠파리를 끌어들이는 이 배설물의 불쾌한 냄새는 애매하고 이중적이었는데, 더 이상 악취라 부를 수 없는 틀림없는 사향의 향기였다. 

 
로잘리와 안나가 맡은 사향의 향기의 실체는 동물의 썩어가는 배설물 냄새였다. 우리의 통상적인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자연으로부터 인간이 기만당한 것이다. 나이든 로잘리는 생리가 다시와 출혈이라 착각하고 그녀는 그것을 자연이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고 기뻐한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암으로 인한 출혈이었을 뿐이다.

자연의 이중성과 모순된 속성의 본질을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분리시켜 사고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언어가 지시하는 대로 사고하고 그 틀 안에 갇혀 살다가 우리는 죽는다. 자연이 인간을 결코 기만한 것이 아니다. 자연의 속성인 이중적 모순 안에 동일성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인간 의식의 한계 때문인 것이다. 자연은 끊임없이 자신의 이중성을 연주하고 있지만 그것을 우리가 귀 담아 들으려 하지 않을 뿐인 것이다.


"맙소사 죽음의 공기 같아 “ 로잘리가 그의 어깨에 기대며 몸을 떨었다. ”정말 슬퍼, 사랑하는 켄 우리가 여기, 죽은 자들 곁에서 만나는 것 말이야. 나는 선한 자연의 무릎에서, 자연의 향기가 불어오는 곳, 재스민과 감탕나무의 달콤한 숨결 속에서 너를 만나기를 꿈꾸었어. 이런 무덤 속이 아니라 그런 곳에서 첫 키스를 해야 하는데, 싫어, 싫다고, 당신 나빠, 하자는 대로 할게. 그렇지만 곰팡내 속에서는 싫어... “


소설 속 인물들이 관람한 홀터호프성안 비밀의 방은 오래전 귀족들의 밀실 같은 곳이었다. 한때 쾌락의 공간이었던 이곳도 시간이 지나 곰팡내 나는 죽음의 공간 처럼 돼버렸다. 사향과 배설물의 향기가 동일하듯 쾌락도 죽음과 동일 선상에 있음을 묘사해주고 있는 장면이다. 결국 쾌락적 욕망은 반드시 파괴되고 죽음으로 이어가게 되어있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분법적 사고와 감각과 이성을 따로 분리시켜 인식하는  인간의 사고가 때로는 자유롭지 못한 사고의 틀 속에 자신을 가둘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늘 끊임없이 모순된 시각의 동일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단지 인간이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분별심을 내고 있을 뿐이다. 이중적 분리의 잣대로 분별하고 욕망하는 인간의 마음이 사향향기와 배설물 향기를 분리시켜 인식한 것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 로잘리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연의 일부인 죽음과 부활, 탄생을 하나로 받아들이면서 죽음에 맞서지 않고 평온하게 생을 마감한다.

“나는 떠나기 싫어. 너희들로부터, 봄이 있는 삶으로부터  말이야. 하지만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봄이 있겠니. 죽음이야말로 삶의 위대한 수단이야. 나한테는 죽음이 부활과 사랑의 기쁨으로 나타났는데, 그건 기만이 아니라 호의이고 은총이었어.”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을 어떤 방향으로 인식하냐에 따라 행복은 자신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행복은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꽃과 그것의 향기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이중성과 모순이 하나로 통한다는 내적 성찰이 이루어질 때, 우리의 사고는 좀 더 자유로워지고 거기서부터 행복이 시작될 것이다. 토마스  만은 자신의 모든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자연의 이중적 본질을 강조하고 있다. 생을 마감하기 전 쓴 이 <기만>에서도 이 견해의 끈을 놓지 않고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들려주며 그 끈을 놓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