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의 <선택받은 사람>이 중세의 서사시 <그레고리우스〉를 소재로 한 작품이라면 <뒤바뀐 몸과 머리>는 인도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카스트 계급의 브라만 출신인 슈리다만과 무사 계급의 딸인 시타, 대장장이 출신 난다, 상반대는 특성을 지닌 두 남자와 이로 갈등하는 아름다운 여인 시타, 이 세 사람의 사랑과 욕망을 다룬 이야기이다. <선택받은 사람>처럼 해학적 의미가 깊은 소설이다.
슈리다만과 시타 두 청년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도하는 중, 목욕하는 아름다운 여인 시타의 모습을 훔쳐보고 슈리다만은 반하게 된다. 슈리다만과 시타가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를 가지게 되지만 난다 또한 시타를 사랑하고 있었고 시타 또한 난다의 정력적인 몸에 대해, 남몰래 욕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숲에 들어간 슈리다만은 길을 잃고 순간 어떤 깨달음을 얻어 자결해 버린다. 난다 또한 슈리다만이 죽을 것을 알자, 자신이 품은 시타에 대한 욕정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그도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 죽은 두 남자를 발견하 시타 또한 자신의 잘못된 감정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여신이 나타나 그녀에게 그 둘을 살릴 기회를 준다. 두 사람의 목을 이으면 살아날 수 있다는 신의 말을 들은 시타는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그녀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이 두 남자의 몸과 머리를 뒤바꿔 연결해 버린다. 이때부터 그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혼란과 괴로움, 갈등에 휩싸인다. 누가 슈리다만인지 누가 난다인지 구별이 어려워져 괴로워하다가, 단카카숲의 도사인 카마다마나 도사에게 해결책을 구하기 위해 찾아간다. 이 도사는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머리를 가진 자가 남편이라고 말해준다. 정력이 좋은 난다의 몸 위에 지적인 머리를 가진 슈리다만은 그야말로 시타가 원하는 완벽한 사람이 되어서 이 둘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 행복도 잠시,ㅜ시간이 지나자 몸을 움직이지 않고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슈리다만은 점점 야위어가고 예전 슈리다만의 몸으로 돌아가게 된다. 반대로 숲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슈리다만의 몸으로 바뀐 난다는 반대로 힘 좋아 보이는 원래 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결국 이 세명은 서로의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이고 목숨을 다시 끓는다.
삶의 모든 상상, 환상, 망상이라는 환영과 환각, 착각과 미망을 지배하고 다르리는 그 마법이 언제나 모든 인간을 사로잡고 있으나 그 어떤 무엇보다도 사랑이란 것에서처럼 사람을 매혹시키고 괴롭히는 그 마술의 힘이 십분 발휘되는 일도 없으리라.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사랑하며 갈망하고 열망하는 일은 인간의 모든 애착과 얽힘과 인연의 원형이며 본질이리니 이 사슬과 수레바퀴에서 그 아무도 벗어날 수 없으리라. 사랑신의 가장 교활한 짝 욕망과 욕정이란 것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토마스 만의 소설 또한 이 욕망에서 낳은 집착이 결국 파괴의 성질을 갖추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는 있는데 작품 속 세명의 인물 각자가 생각하고 그 생각을 중심으로 반복해서 일어난다. 자신을 면밀히 살펴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의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면 충분히 공감하고 반성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욕망은 어떤 대상을 집착하고 애착하는데서 기인한 것이다. 사람관의 관계에서 오는 사랑이든, 돈과 같은 물질이든, 인간의 삶은 결국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욕망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세상 사람들이 수많은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조건과 상황 속에서 맛보고 누릴 수 있는 만족이나 기쁨이란 실제로 인습적으로 제약받아 극히 제한된 것이다. 따라서 임시변통의 대응책으로 자제하고 단념하며 체념하는 일이 다반사다. 우리의 욕망은 한이 없는데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적다. ‘만일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이란 가정과 소망은 온갖 방면에서 빈틈없이 ’ 그렇게 안돼 ‘라는 준엄한 장벽에 부닥치게 된다.
이 소설의 원 제목은 <뒤바뀐 머리,(die vertauschten Köpfe)>이다. 번역자가 독자의 혼동을 막기 위해 나름 세심하게 책 제목을 정했을 테지만, 개인적 의견으로는 < 뒤바뀐 머리> 원제 그대로 제목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토마스만이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메시지들 중 한 가지가, 하나의 현상을 이분법으로 분리시키는 사고에 대해 긴장감을 가져야 됨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늘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메시지 또한 그러하다. 머리와 몸을 분리시켜 생각했던 세 사람의 욕망이 궁극적으로 파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번역자가 원제목을 고려하지 않고, 임의대로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친절은 베풀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독서를 하면서 중요한 소득 중 한 가지가 '욕망'이란 것을 스스로 인식할 줄 아는 힘이 생겼다는 점이다. 뭔가 집착하는 생각들이 올라오면 이것이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단점은 다른 사람의 욕망이 너무 잘 보인다는 것이 문제이다. 남들의 욕망을 인식할 때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려 애쓰고 있지만 잘되지 않는다. 타인에게서 얻은 깨우침은 바로 이것이다. 윗글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이 가지는 고통과 번뇌의 근원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세상의 장벽을 넘어야 충족되지만 중요한 점은 이 벽을 넘었다 한들 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타는 자신이 욕망한 대로 쥬리나단의 머리와 난다의 몸을 가졌지만 그 행복도 일시적인 것일 뿐이었다. 아마 이 진리를 스스로가 인식하고 자신의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삶으로부터 오는 무게감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진심으로 '자유'를 욕망한다.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자유를 얻기 위해, 자유에 대한 갈망조차 내려놓아야 참된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삶의 화두로 삼아, 욕망에 끌려가지 않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정진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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