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feat. 자아)

Christi-Moon 2024. 6. 23. 15:15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은  토마스 만의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마지막 작품이다. 다 읽고 난 후 토마스 만이 이 뒤를 어떻게 마무리했을까,라는 호기심과 아쉬움이 남긴 했다. 읽고 난 뒤 미완성이 토마스 만의 의도이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린 시절 펠릭스 크롤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고 어른들을 속이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집안 파산으로 대부 쉼멜프레스터의 도움을 받아 펠릭스는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내고, 파리의 한 호텔에서 일하기 위해 파리로 가는 도중, 자신도 모르게 어느 우플레 부인의 보석이 든 상자가 그의 트렁크에 우연히 섞여 들어온다. 엘리베이터로 일하던 호텔에서 펠릭스는 부인과 다시 만나 관계를 맺고 우플레 부인은 그에게 나머지 보석도 선물로 주고 이것으로 펠릭스는 많을 돈을 가지게 된다. 이후 펠릭스는 파리의 여배우와 사랑에 빠진 베노스타 후작을 만난다. 후작의 부모는 배우와의 연애를 막기 위해 아들을 세계여행에 보내지만, 후작은 여배우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펠릭스와 자신의 신분을 바꾼다. 이렇게 후작이 된 펠릭스는 리스본을 향하고 리스본으로 가는 기차에서 우연히 리스본의 고생물학자 쿠쿡 교수와 대화를 나누게 된 펠릭스는 리스본의 도착해 그의 부인과 딸과 함께 지내며 이 두 모녀와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작품은 미결로 끝난다.

그런 행동은 보다시피 일종의 이중생활을 하는 결과가 되었고, 그 생활의 품위는 어떤 모호함에 있었는데, 그러니까 어떤 모습이 본래의 ‘나’이며, 어떤 모습이 꾸민 ‘나’ 혹은 가장한 ‘나’인지 확실치 않은 데에 있었다... 그러니까 어쨌든 나는 꾸미고 가장을 하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현상의 형식 사이의 가면을 쓰지 않은 현실, 즉 ‘나’-스스로의-존재‘라고 하는 것은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삶이 세상이 부여해준 지위, 즉 만들어진 자아를 '참자아'로 착각하며 사는 것과 사기꾼 펠릭스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펠릭스의 자아 변신의 여정에 후반을 감옥일까? 감옥이라는 공간은 펠릭스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장소가 될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작품 속 펠릭스가 과거를 회고하면서 경험하고 깨달은 삶의 통찰이 작가로서 살아간 토마스 만의 철학을 집대성한 것이 아닐까 싶다.

펠릭스가 후작이라는 자아의 정형적인 틀 안에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다채롭게 창조해 갔듯이, 세상이 부여해준 작가로서, 지위로 평생을 살아간 토마스 만의 삶 역시 펠릭스의 삶과 본질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를 거듭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토마스 만


어린 시절 일정 기간을 제외하고 우리는 자신에게 놓여있는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더 나아가 세상에 부여해준 지위에 맡게, 싫든 좋든 우리는 자신을 숨기고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이 주어진 지위에 맞춰 살아야만 한다. 아마도 그것은 펠릭스가 후작을 연기하게 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펠릭스가 후작인 ‘척’하며 살았다면, 우리는 '척'하지 않고 사는 것일까?  펠릭스는 사기꾼이고 우리는 아닐까?  펠릭스가 '후작'이 되기 위해서 고전분투 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것일까? 우리는 세상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 고전 분투 했기 때문에 그 가치는 곧 ‘나’와 동일시해도 되는 것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펠릭스가 받은 후작이라는 지위도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다. 그도 '후작'이라는 지위를 얻기까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다. 펠릭스는 어렸을 때부터 후작이라는 역할을 창조하기 위해 충분한 자질과 그 역할 놀이를 즐기며 그렇게 만들어지기 위해 노력했다.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이 주어진 물질적 가치를 위해 고전분투는 것과 펠릭스가 후작의 역할을 하기 전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물질적 가치를 나에게 높이 부여해 주면 그것이 곧 ‘나’가 된다. 즉 물질적 직위가 나의 자아로 생각하는 것처럼, 이 소설에서 세상의 물질적 가치는 ’ 후작’의 상징적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의 물질적 가치가 ’ 후작‘의 이름을 사칭해 부와 명예를 즐기는 펠릭스의 삶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리도 명예와 부를 가질 수 있는 지위를  원하고 그 지위에 걸맞도록 자신을 꾸미고 주어진 역할로 살아간다.

실제로 펠릭스는 자신과 후작을 완전히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물론 할 수도 없다. 언제 가는 후작이라는 지위를 내줘야 할 뿐만 아니라, 후작이 아니라는 것에 깨어 있지 않으면 큰 실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결국 주어진 지위를 내어놓지 않는가. 언제 가는 내어놓아야 한다. 삶은 유한하니까 말이다. 그런 견지에서, 세상이 주어진 우리의 지위도 펠릭스가 얻은 ‘후작’의 지위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토마스 만이 궁극적으로 이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 기묘한 길동무는 내게 존재와 생명 그리고 인간에 대해-모든 것이 그곳에서 생겨나고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무에 대해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말하기를, 이 지상에서의 삶이란 의심할 여지없이 비교적 급속도로 지나가는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닐라, 존재 자체도-무와 무 사이에 자리 잡은 에피소드적 성질과 같다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은 오직 존재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존재를 통해거 상호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간이란 물체 상호 간의 질서나 관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공간을 점유하는 물체 없이는 공간도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무공간성 무시간성 그것이 무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작품 속 쿠쿡 교수와 펠릭스 와의 만남에서 펠릭스는 쿠쿡 교수의 견해에 매료된다. 위의 내용은 데이비드 봄이 말하는 양자이론에서 나오는 견해들이다. 양자 이론을 통해 이전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도록 길을 닦아준 과학자 닐스 보어, 아인쉬타인과 토마스 만이 동시대 사람인 것을 보면 토마스 만의 지성은 양자 역학 사상과 맞닿아 있다. 펠릭스가 쿠쿡 교수의 말에 매료된 것처럼 토마스 만도 양자 역학에서 얻을 수 있는 삶의 철학에 공감했을 것이다. 이 과학 이론을 통해 토마스 만은 ‘자아'는 본래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신했고, 그것을 이 작품에서 핵심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세상이 주어진 그 지위에 맞는 옷을 입고 ‘Imposter(남의 이름을 사칭하는 자)'로서 우리는 다만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세상이 주어진 '지위'와 '직위' '역할'로 변질되어 그것이 ‘나’인 것 마냥 착각하고 힘과 권력을 휘두르며 때로는 안주하며 살아가게 된다. 펠릭스가 후작과 거리 두기를 하지 않고 동일시하며 행동하는 순간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교훈이 미결된 뒷 이야기에 나오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자신의 지위에 속지 말라고. 언제 가는 모두 벗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반드시, 누구나 말이다. 그러기에 자신과 지위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토마스 만은 펠릭스 크룰을 통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미완성을 남아 아쉽지만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은 토마스 만의 그 어떤 작품보다 유머와 재치가 번득이고, 깊은 삶의 통찰이 녹아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