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Christi-Moon 2024. 8. 3. 15:20

밀란 쿤데라는(Milan Kundera 1929~2023)는 체코의 소설가이다. <참을 구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 운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체코 국민들은 '프라하의 봄'이라 하고 공산주의 체제로부터 탈출하기를 갈망했다. 공산체제의 강대국이었던 소련은 이 운동이 다른 동유럽 공산 국가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해 불법으로 무력 침공 하였다. 이 사태를 배경으로 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이 네 인물의 사랑과 관계 속에서,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그들이 느끼는  각자의 시선을 통해, 삶의 무게를 이분법적 관점으로 구속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의식을 고양시켜 주는 철학적 깊이가 있는 작품이다.
 
2020년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난해했던 내용들이 지금은 좀 더 선명하게 이해되었다. 지속적인 독서의 힘이 쌓여가고 있음에 감사했고, 위대한 문학은 삶의 멘토이며 동반자이며 없어서는 안 될 보물이며 소중한 가치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한 감독이 제작한 영화를 관람하고, 한 작가가 쓴 문학들을 읽어 보는 것은 참으로 유익하다. 그들이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하는지, 그들만의 삶의 가치가 나와 견주어 어떻게 다른지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세상을 새롭게 눈뜨게 해 주는데 도움이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확장에서 얻어지는 삶의 희열은 그 어떤 기쁨과 비교불가하다. 토마스 만에 이어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을 읽으며 또 다른 성장의 결실을 맺어보고 싶다.
 
소련의 억압과 체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외과의사 토마시는 아들 하나를 둔 이혼남이다. 그는 한 여자와 진지하게 사랑에 빠지는 것을 싫어하고, 독신일 때  비로소 자신답게 사는 것이라 여기면서,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종업원 테레자와 사랑에 빠져 동거하기 시작하지만, 토마시는, 화가 사비나와 지속적인 성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런 여성편력을 가진 토마시를 테레자가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예술가인 사비나는 독립적이며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인물로 토마시 말고 대학교수이고 유부남이었던 프란츠와 사랑하게 된다. 사비나와의 외도를 프란츠는 자신의 부인 마리에게 솔직하게 고백하지만 프란츠로부터 구속되기 원하지 않은 사비나는 프란츠를 떠나 미국으로 간다. 한편 토마스는 자신이 기고한 글로 의사직을 그만두게 되고, 테레자와 시골에 내려와 유리창 닦는 일을 하며 자신의 삶의 무게를 덜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테레자는 자신이 집착했던 토마시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몰래 바람을 피우고 토마시를 향한 집착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기회를 가진다. 그러면서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하기 시작한다. 사비나와 헤어진 프란츠는 명예심을 가지고 캄보디아 시위 행렬에 참가하지만 괴한의 의해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토마시와 테레자의 반려견 카레닌의 죽음에 이어 토마시와 테레자 또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법륜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인간은 살아야 할 가치도 없고 죽어야 할 가치도 없다고... 인생을 너무 잘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 지금이 인생이 초라하게 느껴진다고...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지 말고 항상 현재에 살아야 하며,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 속 4명의 인물들은 과거 자신의 삶에 트라우마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현재 삶이 평온한 상태가 아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존재는 무거움 자체로 보인다. 인물들의 불안정한 삶은 그들이 속해있는 국가의 상황과 맞물려 있고, 소련 체제의 억압으로 인한 체코의 상황은 이 작품 속 인물들과 닮아있다.

삶의 무게는 인간의 의식에서 만들어낸 산물이듯 국가의  이데올로기 또한 인간의 인식에서 만들어낸 것일 뿐, 완전한 체제의 성립과  이상적인 이데올로기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고 실재하지 않는다고 밀란 쿤데라는 말하고 있다. 머릿속에 이분법적 사고를 습관적으로(의식하지 못하고) 만들어내, 거기다 미학적 가치를 부여한 '키치'에 불과하다는 게 작가의 이야기이다. ‘키치’는 우리 삶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특별한 것으로 포장시켜 버리고, 삶이 그래야 가치 있는 삶인 것 마냥,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앞 세워 이것이 유토피아로 이끌어 준다고 대중을 선동한다. ‘사비나’를 통해서 말하는 이 ‘키치’가 인상 깊이 남았다. 하나의 체제로 가는 길이 유일하고, 다른 길은 없다고 집단은 인식해 버린다. 대통령 선거 때도 그렇고 종교 간의 분쟁도 다르지 않다. 이런 ‘키치’가 불러오는 집단 움직임의 파괴력에 대해 작가는 경각심을 불어넣어 준다.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이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모든 유럽인달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애 대한 확고 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물론 키치가 유발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키치는 유별난 짓을 할 수밖에 없다. 키치는 인간들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심 이미지에 호소한다. 배은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잔디밭 위를 뛰어가는 어린아이, 배신당한 조국, 첫사랑이 추억, 키치는 백발백중 감동의 눈물 두 방울을 흐르게 한다... 키치는 모든 정치인 모든 정치 행위의 미학적 이상이다. 여러 사조가 공존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서로를 제한하고 무화하는 사회에서는 키치의 독재로부터 어느 정동 빠져나올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독창성을 보호할 수 있으며 예술가는 예기치 않는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흐름 하나가 모든 권력을 쥐는 곳에서 사람들은 대번에 전체주의의 키치 왕국에 빠지게 된다 

 


선거 시즌에 우리가 양쪽 후보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칭찬과 비난은 다 여기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은 반대쪽 진영의 후보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에 위배되면 세상이 제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주위의 혼란을 더 가중된다.

신념이라는 명목으로 ‘키치’에 얼마나 자신의 삶을 묶어두고 자유롭지 못한가. 심지어 그것을 통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타인에게 크고 작게 폭력을 행사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았는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키치는 죽음을 은폐하는 병풍"이다. 이데올로기, 종교뿐만 아니다. 우리가 늘 접하는 광고도 이 ‘키치’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광고되는 제품들을 꼭 필요하다 착각하게 만들고,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선동한다. 그러면 그것이 전부인 것 마냥 믿어버리기 십상이다.  이런 세상에 우리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 그 통찰을 밀란 쿤데라는 책 속 사이사이에 알려준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집단에게 이해 가능한 세상이다. 이해가 되고 가슴을 뜨겁게 만든 뒤, 대중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시스템을 만들어야 그들을 선동할 수 있다. 세상은 키치의 감성 없이는 집단을 움직이기 어렵다는 사실에 대한 작가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집단의 움직임으로 시스템이 돌아가는 사회에서는, 거짓말이 제거되지 않은 세상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어버릴 가능성을 키우는 ‘키치'를 경계해야 됨을 밀란 쿤데라는  강조하며, 그 이면에 가시화되지 않아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고 이해되지 않을지 몰라도, 그 안에 ’ 진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사비나'를 통해 말해주고 있다.
 

창세기에서 이미 신은 인간에게 동물 위에 군림할 권한을 주었으나, 그 권한이란 단지 빌려 준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될 수도 있다. 인간은 이 행성의 주인이 아니라 단지 경영인에 불과하고 어느 날엔가 경영 결산을 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타인의 관계가 어디까지 우리 감정, 우리 사랑이나, 비-사랑, 우호 혹은 증오의 결과인지 또는 어디까지가 개인 간 역학 관계에 의해 사전에 규정되었는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너무 심오한 차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그것은 우리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 동물들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근본적 실패가 발생하며, 이 실패는 너무도 근본적이라 다른 모든 실패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모든 인간관계는 역학 관계로 규정되어 있다. 부모, 자식, 형제, 연인... 감수성의 '키치'로 얽혀있는 이 관계에서 참된 선의가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해 준다. 아마도 밀란 쿤데라는 이점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 후반 ‘테레자’의 반려견, ‘카레닌’ 과의 사랑을 통해, 인류의 잘못된 시발점은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오는 역학 관계이며, 이 역학 관계 안에서, 인간끼리의 참된 선의는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자기와 비슷한 부류 즉 인간에게 베푸는 선의는 진정한 미덕이라 볼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가까운 부모든 연인이든, 인간끼리 선의는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안정을 찾으려는데 기인하기 때문에, 그런 선의조차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만든 '데카르트'의 사상에 비판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테레자가 자신의 반려견을 사랑하는 것처럼, ‘동물한테 유일하게 인간이 참된 선의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니체의 근본적 사상의 밑거름을 한 예로 들어 말해주고 있다.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달리 말해 정신 질환이 발생한 것이 정확하게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의 광기(즉 인류와의 결별)는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그 순간 시작되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 읽고 난 뒤  밀란 쿤데라 철학과 사상적 무게가 가볍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작품 속 토마시 테레자 프란츠 사비나가 전해주고 있는 삶의 무게는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무겁다. 그런 삶의 무게를 덜기 위해서, 과거의 상처, 확고한 신념, 트라우마, 자신이 욕망하는 바를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삶이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질 수 있음을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말해주고 있다.

작품 속 '프란츠'처럼 삶의 무게를 덜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대부분 일 수 있다. 삶의 무게는 자신이 만들어낸 ‘키치’에 불과한 것으로, 실체가 없고 실재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아야만 삶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삶을 무겁고 진지하게 만들어 방황하면서 감정 소모와 에너지 낭비를 이제껏 많이 하고 살았다.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바라볼 때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가벼운 것임을 깨닫기도 하지만, 다시 잊어버리고 무거운 삶으로 돌아가곤 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살아가면서, 삶을 무겁게 만들기보다 가볍게 만든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작품에서는,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며 접근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의 생각을 알아갈 수 있다는 설렘이 막 사랑이 시작된 연인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