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록

영화 <아들> (feat.진정한 사랑)

Christi-Moon 2024. 8. 19. 06:18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형제들이 2002년 제작 각본 감독 한 <아들>은 배우 올리비에 구르메에게 칸, 남우 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올리비아 구르메는 재능 넘치는 다르덴 형제의 페르소나로 <아들> 외에 작품들에서, 비중 있는 역할이 아니었지만, 각기 다른 인물을 멋지게 소화해 낸 존재감 있는 배우이다. 올리비에는 개성 강한 외모를 지닌 배우 라기보다는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 같은 편안한 모습을 지닌 연기자다. 아마도 올리비에처럼 연기력이 받쳐 준다면 이런 평범한 이미지를 지닌 배우가 보다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데 유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의 올리비에는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사시 눈을 가진 남다른 감각을 지닌 목수로 나온다. 자신의  어린 아들을 죽인 살인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곁에 두고 직접 목수일을 배우게 하는 것인지, 그것에 대한 의문이, 영화 보는 내내 가시지 않는다. 이런 독특한 긴장감과 이웃집 아저씨 같은 올리비에의 편안한 이미지가 묘하게 더해져, 칸에서 남우주연상의 영예를 거머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리비에는 5년 전 우발적 살인으로 어린 아들을 잃고 아내와 이혼한 뒤, 소년원에서 나온 청소년들의 재활을 위해 재활 센터에서 목공을 가르치고 있다. 아들이 죽은 지 5년 후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소년 프랜시스가 소년원에 나와 올리비에가 가르치는 재활원에 들어왔다는 명단을 보게 된다. 목공으로 그가 오는 것을 거부하고 용접하는 곳으로 프랜시스를 가도록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마음이 바뀌어 자신이 있는 목공 하는 곳으로 오게 한다. 이때부터 올리비에는 프랜시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다. 아버지 없이 프랜시스가 불우한 가정환경을 가졌고, 목수일에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하지만 쉽사리 애정을 가지고 제자로서 그를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어느 날 올리비에는 프란시스에게 목재 견학도 하고 목재를 가지러 가자며 올리비에 형이 운영하는 외딴 벌목원으로 프랜시스를 데려간다. 이날 프랜시스는 자신의 범죄를 올리비에에게 털어놓고 올리비에는 프랜시스가 목 졸라 죽인 어린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해버린다. 이 사실에 충격받고 겁먹어 도망치는 프랜시스를 잡아 그를 죽이고 싶은 충동에 잠깐 빠지지만 그를 죽이지 못한다. 하지만 프랜시스는 올리비에가 자신에게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버리고 이제껏 스승으로서 올리비에가 보여준 진심 어린 행동들에 대해 마음을 열고 올리비에게 진심으로 다가간다. 이렇게 다가오는 프랜시스를 올리비에는 용서하고 받아들인 듯 목재 이동하는 일을 함께 한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정면 모습을 관객에게 마음껏 보게 내주지 않는다. 초반부는 거의 뒷모습과 그의 옆모습만을 보여준다. 올리비에의 정면을 잠깐 카메라가 비쳐 줬을 때조차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의 표정에서는 읽어내기 어렵다. 영화에서 극적 스토리가 없지만, 이런 올리비에에게서 느껴지는 모호함이 보는 내내 극적 긴장감을 만드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리고 이 모호함은 올리비에의 부인과 그와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영화 속 이 부부는 아직도 애정이 있어 보인다. 아들이 죽은 직 후 왜 둘 관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혼한 뒤 각자의 길을 갔는지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아마도 이 의문은 어린 아들이 죽었을 그 순간의 충격과 고통으로, 서로를 챙길 여력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본다. 자식이 죽으면 보통 부모는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을 서로에게 전가해, 원망하고, 죽은 책임을 상대방에게 던지며 이별하는 부부가 있는 것처럼, 반대로 이 둘은 서로를 너무 사랑했기에 죽음의 책임을 각자의 무게로 돌리고 헤어진 것처럼 느껴져 더 마음이 아팠다. 이 또한 감독의 통찰은 남 다르다. 다시 한번 다르덴 형제의 특별한 감각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르덴 감독은 왜 복수극을 펼치지 않았을까? 왜 올리비에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프랜시스를 곁에 두고 관찰하려 했을까? 올리비에는 목수 내공이 큰 사람이다. 치수에 대한 개념이 정확하고 위기에 대한 대처 능력이 뛰어나며 아주 꼼꼼하다. 그런 그이기에 프랜시스의 우발적 살인에 대해 부인보다는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말로 설명하지 않지만 아들이 죽은 후 재활센터에 잡을 얻은 것으로 부인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아마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 5년 전에는 복수하기 위해서 프랜시스를 자신의 감시망에 두기 위한 하나의 기회를 만든 것 일 수 있다. 영화 초반부 재활 명단에서 프랜시스를 확인하는 장면에서 뭔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재활원에서 일하는 5년 동안 많은 소년들의 각기 다른 상황들을 보고 이해했을 것이다. 이런 환경이 프랜시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은 큰 상처였기에 프랜시스를 바로 받아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다르덴 감독 작품의 대부분은 아버지의 부재가 하나의 소재로 나온다. <로제타> <소년 아메드> <자전거를 탄 소년> <더 차일드> <언노운 우먼> 모두 그렇다. <아들>에서 프랜시스 또한 아버지 사랑이 결핍된 청소년이다. 이 아버지의 부재가 얼마나 어린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잘못된 성장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 문제의식을 느끼게 해 주는데, 다드덴 형제의 여러 영화를 보면 더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아마도 올리비에 역시 재활원에서 일한 5년 동안 그런 소년들을 많이 봐 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프랜시스에 대한 적개심이 연민으로 변하고 그에게 스승으로서 아버지 이상의 역할을 맡아 줄 것이라는 한 줄기 빛을 관객에게 선사하는데, 신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무엇인지 올리비에를 통해서 이해하게 된다.

다른 감독들이 연출한 영화보다 길지 않지만, 엔딩이 다가오기 직전까지 이제껏 쌓인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증은 지속된다. 하지만 등장인물과 관객에게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전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게 해준다. 그리고 결말에 대한 완전한 해소보다는, 지금보다 상황이 좀 나아질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만들어준다. 다르덴 형제는 영화를 통해 인간이 지닌 선한 본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 선함이 세상의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안도감을 만들어 주는게 그들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이다. 다르덴의 작품의 탄탄한 극적 구성과 긴장감의 지속성은 영화 속 인물의 행동들이 치밀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그려졌기에 가능할 것이다. 이런 점들이 다르덴 형제 작품의 위대함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