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불멸>1 (feat. 모든 인간은 불멸한다)

Christi-Moon 2024. 9. 1. 05:24

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다시 읽어 보고 있다. 문학이나 좋은 영화 같은 경우, 한 번 읽고, 봐서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일부만 이해하고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책이 좋아서 읽기 시작했던 시기에는 새로운 내용에 대한 궁금증과 더 많이 읽고 싶은 갈망에 기록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책 안의 정수를 기록하지 않으면 내 것으로 소화해 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이가 들어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이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확인해 보는 경우도 있었다. 불멸을 챕터 별로 읽으면서 기록하고, 내용을 깊이 성찰할 시간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새로운 책을 보고 싶은 욕망의 속도를  늦춰야겠다.

<불멸>의 1부 "얼굴"을 다시 읽어보고 '불멸'에 대한 생각의 오류를 수정하게 되었다. 밀란 쿤데라나 세르반테스 같은 위대한 영혼들만이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불멸한다는 점을 얕게 생각하고, 밀란쿤데라의 의도를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수영장에서 우연히 본 60대 중반의 여인의 몸짓'에 영감을 받아 소설 속 '작가'는 아녜스를 창조하게 된다. 이'몸짓'은 최초 원형에서 변형이 일어나, 재현되면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몸짓이라는 행동이  이어진다는 의미의 본질을 들려다 보게 되면, 한 사람의 생각이 깃든 몸짓을 본 또 다른 사람이 그 몸 짓을 자신도 하고 싶다는 욕망과 충동을 가지게 되면서, 몸짓 원형에 대한 변형이 일어나 새로운 몸짓으로 탄생 재현 된다는 것이다. 자신에 영향을 준 원형의 몸짓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몸짓을 하는 각각의 의식이 담겨 반복됨을 의미한다.
 

의식은 몸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몸은 수많은 의식이 담긴 하나의 공간이다. 그래서 몸이, 우주, 사람이란 소설의 인물은 특히나 더 흉내 낼 수 없는 어떤 유일한 존재로 정의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A라는 인물에게서 관찰된 그 몸짓, 그녀를 특정 지우고 그녀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 내며 그녀와 더불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던 몸짓이 동시에 B라는 인물의 본질이 되고 그녀에 관한 내 모든 몽상의 본질이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점은 성찰을 요한다

 


이 몸짓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사고나 행동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전해지고, 연속되어 이어진다는 것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이며 그것이 바로 인간이 불멸하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탄생도 죽음도 없다는 말을 쉽게 밀란  쿤데라가 이야기 해 준 것 처럼 보인다. 아녜스는 로라에게 영향을 주고, 로라는 아녜스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소설 마지막 장 7부 축복에서 알 수 있다. 로라는 언니 아녜스가 죽은 뒤 형부 폴과 결혼한 뒤 아녜스와 닮아 있었고, 아녜스 또한 남편 폴에게 헌신한 부인 루벤스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소설 마지막 장에, 에필로그처럼 나온다. 자매 간 영혼의 교류가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밀란 쿤데라의 시각은 변형과 순환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베티나와 로라처럼 한 개인의 과도한 욕망에서 오는 불멸에 대한 투쟁은 과연 조화로운 삶인지에 대한 우리의 성찰을 끌어내어 준다.
 

사람도 이와 똑 같이 말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획이다. 어떤 아녜스 어떤 폴도 컴퓨터에 기획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어떤 어떤 원형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어떤 개인적 본질도 없는 그저 원 모델의 단순 파생물인 여러 견본들에서 뽑아낸 인간 존재일 뿐인 것이다...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생상 된 자동차 한 대보다 낫을 게 없다... 그 자동차의 존재론적 본질은 자동차에서가 아니라 다른 곳 말하자면 설계사의 서류 보관함에서 찾아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총괄 프로그램 내의 단순 변이 작용이거나 치환 작용일 뿐이다. 이 총괄 프로그램은 미래에 대한 예견과는 전혀 무관하며, 단지 여러 가능성의 경계들을 정해두고 있다. 그 경계들 사이에서 조물주는 모든 힘을 우연에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제대로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자아'라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 얼굴이 다르다고 너와 나를 구별하는 인식은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되는 것 아닐까?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작가는 독자에게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밀란 쿤데라의 견해는 ‘자아’라는 것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얼굴이 달라서 구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자아는 실체가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당신은 거울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고 생각해 봐. 당신은 당신 얼굴을 꿈꾸겠지. 아마 당신은 그 얼굴을 당신 내면의 외적 반영으로 상상했을 거야. 그러다가 마흔 살쯤 되었을 때 사람들이 당신에게 유리 거울을 비춰주었다고 가정해 봐... 그때 당신은 분명히 알게 되겠지. 당신 얼굴이 곧 당신인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불멸>의 1부 "얼굴"을 읽고 기록해 보면서 밀란 쿤데라가 지닌 삶에 대한 통찰도 예사롭지 않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숙연해진다. 밀란 쿤데라는 불교철학과 인도 사상, 양자 역학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에 동의하며, 토마스 만의 통찰들과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위의 사상들을 밑바탕에 깔고 작가만의 접근 방식으로 구성해 나갔을 뿐이다. 선조들의 철학이 시 공간을 넘어 재현 변형 되어 일어나고 있는 산 증거물로 재창조된 것이다. 고무적인 것은 불교 철학과 양자역학을 접하고부터, 예전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힘이 생기고, 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더 깊어졌다. 책은 내 삶의 방향성을 180도로 바꿔준 우주가 준 선물이다. 위대한 그들이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세상에 나도 동참하고, 내 삶에 그들의 사상이 입혀져 거듭나고 싶다. 많은 것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