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밀란 쿤데라의 <불멸> (feat. 감정의 노예)

Christi-Moon 2024. 8. 25. 18:1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다음으로 읽기 시작한 소설 밀란 쿤데라의 <불멸>은, 아녜스 로라 자매, 베티나와 괴테의 이야기를 통해 챕터 별로 평행 교차하며 구성된 작품이다. 이 인물들의 삶과 생각들을 작가가 직접 화자로 나와 이들의 삶을 구성하는 형식으로 짜여 있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며 매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밀란 쿤데라가 이 작품에서 베티니와 로라가 그토록 추구하는 '불멸'의 진정한 당사자는 결국 이 소설을 만들어낸 작가 즉 밀란 쿤데라가 아닐까 싶었다. 밀란 쿤데라 본인은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지구가 망하지 않는 한 그는 작가로서 불멸할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불멸을 인지하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 속 베니타는 당대 명성 있는 작가 괴테를 등에 업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자신의 이름이 영원 불멸 하기를 원한다. 또 다른 에피소드에 나오는 로라는 자기와 관계하는 사람으로부터 지속적 사랑받기를 갈구하고 자신을 각인시키려는 불멸을 원한다. 크고 작은 차이일 뿐 베티나와 로라가 추구하는 불멸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이름이 타인에게 남겨지기를 원하는 의지는 일종의 욕망이며, 일종의 병적 집착에 가깝다 볼 수 있다. 베티나 처럼 정치가나 예술가가 추구하는 불멸은 육체가 죽은 후 자신이 남긴 작품이 후대에게 새롭게 재평가되면서 불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후자와 다를 뿐 그 에너지 강도는 동일하다. 규모가 크냐 작냐 주어진 조건만 다를 뿐이다.
 
세르반테스도 자신이 쓴 <돈키호테>로 불멸할 것이다,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돈키호테>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위대한 작가들은 신처럼 그들의 글들이 영원 불멸하겠구나 하고. 밀란 쿤데라는 <돈키호테>에 대해 "모든 소설가는 어떤 형식으로든 모두 다 세르반테스들의 자손들이다"라고 말했다. 별 볼 일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돈키호테>를 읽으면서 세르반테스가 불멸에 대한 인식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는데 밀란 쿤데라가 <돈키호테>를 읽으면서 아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스페인을 넘어 나 같은 사람에게 까지 세르반테스는 우상이니까 말이다.

밀란 쿤데라는 살아생전 언론의 인터뷰를 하지 않고 자신이 쓴 작품 설명을 따로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불멸> 속 괴테나 베토벤처럼 사후 가십에 오르내리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마도 명성에 대한 동전 양면의 속성을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밀란 쿤데라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자주 거론되었지만 수상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것이 이런 이유가 아닐까. 상 따위는 밀란 쿤데라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살아생전 명성과  권력을  다 잡은 괴테처럼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이 가벼움>처럼 다양한 삶의 통찰을 <불멸>에서도 말해주고 있다, 7부로 구성된 이 소설 속     소제목 '아마골로기' '호모 센티멘탈리스' 같은  용어는 밀란 쿤데라가 만들어낸 단어로, 그의 날카롭고 세상을 남다르게 인식하는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전작에서 사비나를 통해 말한 '키치'와 맥락이 이어지는 '호모 센티멘탈리스"는 이성적인 인간임을 주장하는 세상이 결국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부터 생성된 가치를 숭배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음을 지적한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것에 대해, 경각심과 문제의식을 제시해 주고 앗다. 그 감정이 대표적으로 우리가 아름답게 생각하는 말, '사랑'이다. 작품 속 베티나와 로라는  끊임없이 타인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이것에 중독된 것처럼 삶을 살아간다.
 

베티나는 아르님에게 다음 편지를 쓸 때, 성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생각했다. "멋진 격언을 하나 찾아냈어요.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옳다. 비록 틀렸다 할지라도."라는 거예요. 루터는 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진정한 사랑은 종종 틀린다."라고 말이에요. 이는 격언보다 못한 것 같아요. 그런데 루터는 이런 말도 했죠. "사랑은 모든 것에 앞선다. 희생이나 기도 보다도 앞선다". 결론적으로 사랑이야말로 최상의 덕목이에요. 사랑은 우리의 의식에서 지상의 것을 지우고, 천상의 것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요. 그래서 사랑은 우리를 모든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죠.

 
 
베티나는 당대 명성을 지닌 작가와 예술가였던 괴테나 베토벤을 만나 자신의 존재를 그들에게 어필하고 세상 속에  자신을  영원히 알리고 싶어 하는 야망과 욕망의 소유자다. 그녀의 그런 행동이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미화되지만 결국 이 사랑은 불멸에 대한 망상과 자아 팽배감에서 오는 부작용임을 밀란 쿤데라는 이야기하고 있다.

쉽게 생각해 보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도 다르지 않다. 자식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부모 스스로가 못다 한 사회적 부와 성공을 자식이 대신해서 가져다 주기를 바라고 뒷바라지하지 않는가. 아니면 자신의 사회적 입지와 명성을 자식이 대를 이어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식을 키우지 않는가. 우리는 이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산다. 선거철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위해, 국민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당선되면 사랑하고 희생할 것을 굳게 약속하며, 자신의 정치욕을 정의감으로 변형시켜 선거 투표자들을 유혹한다. 그들은 국민들을 위한 사랑과 정의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봉사 정신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믿고 국민들은
감동받고 선동된다. 인간이 타인에게서 불멸하려고 하는  궁극적 의지가 사랑으로 미화되어 그놈의 사랑에서 나오는 헌신에, 조종당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이에 따른 본질적 문제점을 밀란 쿤데라처럼 집어내는 것은 어렵다. ‘감정’이 중요른 가치인 것 마냥 쿤데라의 말처럼 내 삶의 방향이 좌지우지당하고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정신이 번쩍 차려졌다.

호모 센티멘탈리스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감정을 느낄 수 있으므로)  감정을 가치로 정립한 사람으로 정의해야 한다. 감정이 하나의 가치로 간주되면 그때부터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느끼고 싶어 하며, 또한 우리 모두가 우리의 가치들에 긍지를 느끼는 만큼 우리의 감정들을 전시하고자 하는 유혹이 커진다... 정의를 내리자면, 감정이란 우리 몰래, 그리고 대게는 우리 육체를 거스르면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우리가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는 순간부터(둘키네를 사랑하기로 결심한 돈케호테처럼, 우리가 그것을 느끼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감정은 더는 감정이 아니라 모방이요 감정의 과시다. 그것을 사람들은 흔히 히스테리라고 부른다. 그래서 호모 센티멘탈리스(다시 말해서 감정을 가치로 정립한 사람)는 사실 호모 히스테리쿠스와 같다.

 
존재하고 있다 믿고 있는 자아의 비대함으로, 참을 수 없게 우리는 가벼움과 무거움을 오가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어떤 일에 시시 일비 하게 되고 결국 감정은 널 뛰고 지옥과 천당을 오간다. 밀란 쿤데라가 책에서 말한 것처럼 "감정이란 것은 우리가 느끼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작동하기 시작한다." 책 속의 소제목을 ‘호모 센티멘탈리스’라고 했지만 작가는 이것을 ‘호모 히스테리쿠스’ 붙이고 싶었던 것 같다.

배우가 자신의 역할에 몰입해 위대한 감정의 순간을 연기해, 관객을 매료시킨 다음, 그 공연이 끝나면 위대한 배우가 역할로 느꼈던 감정은 무심한 태도로 돌변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이다. 감정을 그런 것이다.

 
결국 우리의 '자아'가 강화되는 것은 ‘감정’으로 인해 그렇게 된다는 것이 밀란 쿤데라의 시각이다. 즉 자아라는 것은 생각에 의해서 강화된다기보다 개인이 느끼는 개별적 감정을 통해, 상대방과 나를 구별하면서 자아 팽배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개인이 받은 고통은 어느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고 실질적으로 개인의 고통은 상호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작가의 의견이다. 거기서 우리는 자아가 실재한다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는 있는 것인가. 감정도 실재하지 않고 자아도 감정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면, 둘 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이 점을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되고 작가는 이것을 베티나와 로라를 통해 강조하는가.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위대한 영혼들이 일관되게 하는 명언이 있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 말인즉슨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때 스스로를  알기 위한 성찰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고 본다. 평정심, 명상, 마음 챙기기가 요즘 거론 되는 이유가,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을 스스로 인식할 줄 아는 힘을 기르고 보다 지혜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실체 없는 감정이 마치 있는 것처럼 고착화되면서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가치가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는 밀란 쿤데라의 예리한 시각은 무지한 나에게 새로운 통찰과 지혜를  전해주어, 읽는 내내 감탄하고 그에게 감사했다. 이제 위대한 작가의 지혜를 내 것으로 어떻게 녹여내 삶에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지, 그것에 대한 숙제가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