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런던 여행을 끝으로 내일 서울로 출국한다. 이틀 전 감기가 심하게 와 어제는 거의 못 움직이는 상태였다. 여행지에서 이렇게 심하게 아픈 적은 처음이라 속상했다. 늘 살아가면서 예기치 않은 상황에 맞닿았을 때 마음의 평정 상태와 그 상황에 벗어나려는 저항감에 나를 갉아 먹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 감기 걸린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여행에서 이렇게 지하철을 많이 탄 적은 처음이었다. 시내 쪽 숙소가 비싸 중심가와 떨어진 곳을 찾다 보니 지하철을 자주 탔다. 런던 지하철 내부가 좁아 서울과 달리 낯설기도 했지만 무조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 좁은 지하철 안에 다양한 민족이 모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신기했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 속에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따뜻해지고 뭔가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신은 참으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창조하고 함께 어울려 살도록 만들었구나..아름다운 세상이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더 와닿았다. 아무튼 이렇게 사람 많은 지하철을 자주 타고 심하게 걸어 다녔다. 또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에 땀을 내고 걸어 다녔으니 감기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여행의 취향도 계속 변화고 있다. 예전에는 여행지에서 할 일을 계획하고 뭔가 많은 것을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면 지금은 대충 계획을 세우고 다니게 되었다. 공연 관람이나 전시도 미리 한국에서 예매를 하고 왔었지만, 이번에는 여기 와서 표를 구했다. 런던 해롤드 핀터 극장에서 상연한 멕베드 공연이 매진이라 환불한 티켓을 얻기 위해 두 시간 동안 줄을 서고 기다려서 아마 감기가 크게 걸렸을 것이다. 그래도 두 시간 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착한 가격으로 나쁘지 않은 좌석에서 멕베드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공연이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시 한번 런던의 공연 기술에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어 좋았다. 모든 자리에서 이어폰을 끼고 배우의 목소리와 음향효과를 서라운드 시스템으로 들을 수 있었다. 작지 않은 공연장에 배우들의 내적 독백을 깊이 있게 들을 수 있었어 더욱 좋았다. 배우 대사와 환상적인 소리 효과와 음악이 어울러져 완벽한 소리 조화를 이루는 공연 체험을 할 수 있었다는점에서 만족스러웠다.
전공자로서 무대에서 배우가 큰 소리로 연기하는 이전 방식을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기술이 발전하면 예술의 형태도 바뀐다. 우리는 연극배우들 발성에 대해서 기존의 고정관념을 깰 필요가 있다. 배우 손석구의 연극 대사 관련 논란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연극배우들은 아직 무대에서 큰 소리를 내는 게 연극의 특징을 넘어 특권이며 배우의 발성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제는 핀 마이크 기술도 발전하고 심지어 기술을 통해 이어폰으로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 대사를 듣는 시대가 왔다. 아직 이 부분에서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제작비에 영향을 받고 관람객의 표 값도 좌우되기 때문에 쉽게 우리나라에서 당장 상용화되기 어렵겠지만, 연극도 기술이 발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시스템에 적합한 배우 훈련 방법과 제작 형태의 변화를 위한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멕베드에 이어 다음날 관극한 윈덤극장 (Wyndham's theatre)에서 본 공연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이다. 영국 배우 마크 스트롱(Mark Strong)이 오이디푸스 역을 맡은 작품이라 이 작품 또한 매진 사례였다. 다행히 비싸지 않은 자리를 구해 관람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한국 국립극장에서 암스테르담 시립극단이 제작한 오이디푸스를 스크린을 통해서 본 적이 있었는데, 그 공연이 사실 더 좋았다. 암스테르담 시립극단 배우들의 에너지가 정말 좋았다. 여기 런던 공연의 오이디푸스 부인이자 엄마 역할을 맡은 레슬리 맨빌(Lesley Manville)의 연기가 좀 더 여성적이고 모성애적인 느낌이 강했다면, 암스테르담 시립극단 여배우는 훨씬 에너지와 야망이 강한 인물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전제적인 배우의 에너지가 암스테르담 시립극단이 좋았다고 생각 드는 이유가 어쩌면 영상을 통해서 본 공연과, 실제 무대에서 본 공연이기 때문에, 관람의 포인트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긴 해야 될 것이지만 말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부인이 친모라는 사실을 안 그 순간 윈덤극장의 무대는 5초 이상 정적이 흘렀다. 런던 관객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긴장감이 극장에 가득 찼다. 공연자와 함께 호흡하는 런던 관객의 반응이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영국 미술관이 무료라는 점은 여행자에게 상당히 큰 메리트이다. 특별 전시의 경우가 예외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다르게 여행경비를 절감할 수 있어 런던 여행은 매력적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첫 해외여행을 런던으로 가라고 추천해주고는 한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여행의 기쁨을 얻었다는 점이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빈센트 반고흐 특별 전시회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미술관에 가서 그 전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인지 거주하시는 분들인지 모르지만 표를 못 구해 내셔널 갤러리 멤버십을(멤버십 가입하면 특별전시공연 무료) 일 년 가입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 나는 못보구겠구나(멤버십은 거의 30만 원가량) 생각하고 홈피에 들어가 보니 이틀 후, 오후 관람표가 남아있었다. 대성공이었다. 60점가량 전시된 고흐 생애 후반부 작품들인 데다가,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까지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역시 고흐는 달랐다. 고흐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의 스토리텔링과 겹쳐서 더 마음이 쓰일 수 있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주는 에너지는 남다르다. 이 고흐 전시 관련의 정리는 기회가 되면 다시 블로그에 정리해보려 한다.
그 다음 계획되지 않은 여행의 즐거움은 런던에도 모코 뮤지움(Moco Museum)에 있었다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모코 뮤지움도 그랬지만 런던에도 암스테르담에만 있는 줄 알았던 모코 뮤지움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버스 타고, 다른 곳을 가다가 우연히 지나치면서 보게 되었다. 언제 다시 런던에 올지 모르는데 그냥 모르고 지나쳤다면 아쉬울 뻔했다. 바르셀로나처럼 전시 화가들은 비슷하지만 바스키야와 뱅크시 작품이 더 많았다. 네덜란드에서 영국 화가 뱅크시라는 화가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런던 모코 뮤지움에 뱅크시의 좋은 작품이 여러 점 있어 좋았다. 19파운드 입장료를 지불했지만 만족스러운 전시였다.
이제 여행이 끝나가지만 늘 여행은 감사함을 가지게 된다. 물론 아직 다 끝나지 않아, 섣불리 말할 것은 안되지만 여행에 특별한 것을 보고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홀로 낯선 타국에 와서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기에 감사하다. 이곳 사람들 역시 안전하게 나의 여행을 도와준 것이다. 한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영국 특히 런던은 여러 민족이 살아가고 있기에 특별히 아시안이라고 해서 눈에 띄지는 않아 좀 더 안전하기도 하지만, 여행의 노하우 랄까, 여행지에서 여행자라고 너무 티를 내지 않는 외형을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영어를 잘했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영어 리스닝의 장벽에 여전히 부딪치기도 해서, 이 부분을 언젠 가는 극복하고 싶다. 아무튼 이 기적 같은 여행이 무사히 끝나가고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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