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는 오늘 글과 다음 글까지 써서 정리하면 마무리가 될 거 같다. 원래는 천재 작곡가 아드리안이 파우스트 박사 작곡하는 과정을 정리하는 것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지만 다시 앞부분을 읽으면서, 8장 9장 아드리안의 스승인 벤델 크레추마어의 이야기가 새롭게 읽히고, 처음과는 다른 느낌으로 전달되어 8장을 중심으로 전과 다른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이 8장은 세 부분으로 나눠진 34장을 제외하고는 이 작품에서 가장 긴 장이다. 9장에서 '화자'가 8장이 길어진 이유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이 8장은 아드리안의 삶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아드리안이 크레추마어에게 들은 강연들은 아드리안의 잠재되어 있는 감각을 깨워 풍부한 예술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고, 강연자의 음악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과 열정 그리고 스승 스스로 다하지 못한 음악에 대한 욕망이 고스란히 아드리안에게 전해져 천재적 음악성을 지니게 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런 벤델 크레추마어의 음악 강의는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실제로 크레추마어에게 강의를 듣는 것처럼 빠져들게 하는 장면이었다. 이 강의는 아드리안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이며 천재의 사전적 의미인,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지상의 여러 기운이 합쳐져 하늘이 감동할 만큼의 재능을 부여받은 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뛰어난 제자는 스승의 것을 취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자신만의 꽃을 피운다. "화음은 계속 발전된 형태로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어 그렇게 발전을 시켜야, 다시 말해 다른 화음으로 조바꿈을 해야 비로소 각각의 부분들이 독자적인 성부를 이루거든"이라고 크레추마어가 말한 것처럼 음악과 세상의 이치는 다르지 않은가 보다. 크레추마어의 가르침에도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발전된 형태로 나아가려는 경향이 누구보다 강한 아드리안이었던 것이다.
내가 크레추마어의 강연들을 그토록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그 강연들을 이처럼 상세히 묘사할 생각이 들었단 말인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며 이유는 간단하다. 즉 아드리아이 당시에 그 강연들을 들었고, 그 강연들이 그의 지성을 자극하고 정서 속에 침전하여 그의 상상력에 소재를 제공했다는 점이 바로 그 이유이다. 그런 소재를 자양분이라 불러도 좋고 아니면 자극이라 불러도 좋다. 자양분이 되었든 자극이 되었는 결국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인생과 예술을 새로 시작하는 초보자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서는 그에 대한 전기를 쓸 수 없고, 어떤 정신적 실체로 구성된 존재를 제대로 묘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크레추마어가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 부분은 그를 심한 말 더듬이로 설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증이 들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우선 미국에서 태어난 독일인의 후손이었다는 점 그래서 어린 시절 미국에서 살다가 독일로 건너왔기에 언어 적응이 쉽지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말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상치 못한 곳에서 혹은 예상한 곳에서 힘들게 말을 이어 갔기에 그가 강연하는 내용들이 매끄럽게 청중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소리에 예민한 아드리안은 스승의 말소리가 음악적 영감의 한 소재가 되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크레추마어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예술적 영혼이 전해져 와 아드리안에게 까지 흘러간 것임을 알 수 있다. 크레추마어의 고향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독일 촌락에, 신앙으로 존경받는 지도자였던 콘라트 바이셀이라는 영적 지도자에 관한 이야기가 그 뿌리이다. 이는 실제 인물로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 에프라타에서 재세례파를 창시하고 에프라타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음악을 종교적인 영역으로 확장시킬 수 있으며, 그 종교성을 충족시키는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종교 목적에 맡는 유용한 음악 이론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인 결과 그 지역의 종교 생활 가운데, 음악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만들었고, 이런 음악에 대한 열정이 종교와 관계를 맺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음악의 영역까지 개척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음악이 외부 세계로 뻗어서 확장되기에는 지나치게 특이했기에, 시들해져서 잊히고 말았지만, 크레추마어는 그 음악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상기시켜 설명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천상의 경건함과 부드러운 마음을 불러일으켰으리라는 것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입을 거의 열지도,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놀라운 음향적 효과를 냈을 거라고 했다... 모인 사람들의 머리 위를 마치 천사들처럼 떠다녔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익숙한 어떤 것에도, 기존의 어떤 교회 찬송가와도 닮지 않은 것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고 말했다... 그 노랫소리를 듣고 싶은 충동에 못 이겨서 말에 안장을 얹고 노래를 듣기 위해 5킬로미터를 달려갔다. 자신이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오페라 극장에도 가보았지만 거기서 들은 것은 어디까지 난 귀를 위한 음악이었던 반면에 바이셀의 음악은 영혼 깊숙이 울려왔으며 더도 덜도 아닌 천사와의 느낌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바이셀이 신봉했던 음악의 혼은 크레추마어의 아버지로 이어졌고, 그 당시 펼쳐졌던 음악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크레추마어는, 바이셀에 관한 강연을 아드리안에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 강의를 들은 아드리안은 자신의 것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세상은 늘 변화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 연속성과 동일성을 내포하며 순환되고 있음의 예를, 여기서도 그 주제를 토마스 만은 놓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연속성과 동일성은 변형, 즉 지속적인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크레추마어가 바이셀에 관한 강연 마지막이야기 중, 이 큰 시대의 흐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자신만의 독특한 세상과 역사를 만들고, 비록 미미하다 느껴질 수 있지만 진정한 보석을 알아보는 사람들에 의해 그 가치를 인정받고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크레추마어의 이런 시각과는 달리, 아드리안은 다른 관점으로 바이셀에 대해 평가한다. 앞에 말한 것처럼 아드리안은 무조건 다른 사람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어떤 하나의 현상을 확장시키려는 의지가 있다. 한 인간의 의지는 동일성 안에 변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밑거름인 것이다.
아드리안은 그 인물을 조소하면서도 그런 태도에 얽매이지 않고 그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을 중시했다... 반쯤 경탄하면서도 웃으며 조롱할 여지를 남겨 두는 식으로 거리를 유지할 권리를 중시했던 것이다. 반어적으로 거리를 취해야 한다는 요구, 그리고 확실히 사물보다는 인간을 존중하는 차원에서의 객관성 요구는 내게 대체로 대단한 오만의 표시로 여겨졌다. 당시 아드리안처럼 나이도 어린 사람이 그런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불안하고 주제넘은 일이며, 영혼의 건강에 대해 근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이런 아드리안의 ‘오만의 표시’는 스스로 마지막 장에서 밝힌 것처럼 악마를 불러들이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25장의 악마와 크레추마어가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드리안의 창작 욕망을 끌어올리려고 하는 악마의 역할을 크레추마어도 하고 있었다. 악마의 탈을 쓴 스승, 이 세상 사람이지만, 말 더듬이 같은 위장술로, 뭔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어느 누구도 그에게 숨겨진 악마의 변장술에 대해 의심 못하게 만들었지만, 그 스승 또한 아드리안의 파멸에 일조하는 악마가 아닐까 라는 재미있는 상상을 하면서, 악마에 대한 인식을 앞으로는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될 듯하다. 유전적으로 편두통이 심한 아드리안이어서, 크레추마어의 조언에 따라 밤새워 책을 읽는 것에 걱정이 된 '나' 제레누스에게 크레추마어는, 신체 건강이라는 것은, 속물적인 가치라고 치부해 버린다. 아드리안의 편두통은 나중에 자신이 미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그를 괴롭힌다. 그런데 그의 스승은 그것에 대해 냉정하리만큼 가벼이 생각하고, 오직 아드리안의 예술적 재능을 고양시키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뭔가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아드리안을 은근히 몰아세우는 느낌이다.
"그래 자네는 건강을 위하는지 모르지만, 당연히 예술이나 정신은 건강과는 별 상관이 없어, 아니 어느 정도까지는 건강과는 대립된다고 할 수 있지. 어쨌든 건강에는 개의치 않는단 말일세. 조숙한 독서는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주치의의 입장에서 보면 독서란 평생토록 조숙한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나는 그런 주치의 역할에는 적합하지 않아... 그 친구가 고리타분한 독일 시골의 껍질을 깨고 나오려면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야. 그건 너무 당연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고 카이저아셰른의 묘한 분위기가 연상되면서 화가 났다.
시간이 없다는 크레추마어의 말투는 25장의 악마의 말과 겹쳐진다. 악마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크레추마어에게도 악마의 기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토마스 만은 양파 같은 사람이다. 까도 까도 끝이 없을 것 같다. 읽으면서 찾아내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숨겨져 있을까라는 염려마저 든다. 아마도 반복해서 읽는다면 이제껏 알지 못하고 넘어갔던 것들을 더 찾아내고 새롭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것이다. 그의 작품 <요셉과 그 형제들>을 읽기 위해 책도 구입해 놓고, 참고하기 위한 성경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이 <파우스트 박사>를 내려놓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미처 찾아내지 못한 것들에 대해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아직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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