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박사 13에 이어 34장에 내용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장을 꼽자면 34장이 아닐까 싶다. 독일이라는 국가의 상황과 아드리안의 음악세계가 서로 상호 연관성을 가지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프랑스 사회 철학자 소렐 (Georges Eugene Sore) 이 주장한 반(反) 의회주의와 행동주의 사상을 다룬 ⎡폭력론⎦의 내용이 흥미로왔다.
대중 시대에는 의회에서의 토론이 정치 의사를 결정하는 수단이 되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며, 대신 앞으로는 원시적 선동으로 정치적 에너지를 끌어내어 행동하는 촉발하는 신화적인 허구가 대중을 사로잡을 거라고 통찰하고 단언했기 때이다. 대중의 귀에 솔깃하고 그들에게 적합하다고도 할 수 있는 허구적 신화가 이제부터 정치적 수단이 될 거라는 이 책의 예견이야말로 대담하고도 자극적인 것이었다.
이 폭력론이 독일 나치의 파시즘 세력에 악용되었다고 한다. 이 소렐의 말하는 힘의 논리가 우세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예견을 읽으면서 요즘 유튜브 시대와 교차되는 지점이 있어 씁쓸했다. 유튜브에서 수 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그 정보를 통해 전파되는 개인의 편향된 가치관과 정치 이데올로기, 날조되고 조작이 충분히 가능한 영상 매체, 마치 진리 이것 마냥 날조되기 쉬운 허구들, 보이지 않는 광기와 망상이 난무하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물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혜롭게 그것을 선별하고 판단하기는 쉬지 않다. 그곳의 흐름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처럼 강요되고 소외되지 않기 위해 물질적 소비를 무의식적으로 강요당하고 삶의 방향성을 자유의지의 생성을 알게 모르게 저지시킨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이전에는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드러나게 전쟁을 통해 힘을 모으려고 했다면, 지금은 디지털 매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진리인 것처럼 세뇌당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리의 가치와 개인의 가치가 격하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진리는 힘을 얻지 못하고 진리는 삶으로부터 유리되며 공동체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비웃듯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힘의 논리, 삶의 논리, 공동체의 논리가 진리보다 훨씬 더 우세하고 진리가 추구하는 목표라는 것,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자는 언제라도 진리와 학문을 과감히 도려내고 지성을 희생시킬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일깨워 주고 있다... 모두가 합세해 학문이라는 것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무기력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대중의 정성에 공감하고 집단으로부터 고립되기를 원치 않은 법정은 집단정신에 위배되는 이론과 진리를 옹호할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 문제가 있었다. 이것을 방관하는 자, 시대의 왜곡 현상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지식인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나아갈지 그 방향성과 벌어질 현상을 예측할 수 있는 지성인들, 그들은 알면서도, 그것을 외면하거나 자신의 심증이 맞는지 즐기고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34장에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사태에 신이 나서 장난 삼아 모의 법정을 여는 지식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들의 장난 아닌 장난에, 몸무게가 6kg나 빠졌다는 소설 속 '화자'의 양심 고백은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드리안이 말한 것처럼 새로운 노선이 설정되었다면 과거의 미진한 문제를 새로운 상황 속으로 끌어 온 다음에, 지금의 새로운 것을 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 예술의 세계뿐만 아니라 정치와 권력 같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독재"라는 내면적 지속성의 잔재가 사라지지 않고 변질되어 유사한 방향으로 실현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새로운 시대가 도약하고, 민주주의가 확보되어 인간의 존엄이 존중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기득권의 이익 유지를 위한 힘의 지배"는 반복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배운자들과 있는 자들이 더하다는 말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나는 잠시라도 진지한 자세를 취하고자 제의해 보기도 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비록 공동체의 요구에 따를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를 고려해 보자는 뜻에서였다. 진리를 희생시켜서라도 공동체에 봉사해야 한 한다는 생각보다는 비록 쓰라린 진리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진리가 간접적으로라도 공동체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탐구에는 늘 전제 조건이 있었다. 다만 그 전제 조건이 과연 무엇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동체의 폭력과 권위였다. 그 전제 조건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학문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처할 수 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사실 폭력의 기반은 확고해졌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 즉 독일이라는 유럽에 속해있는 강국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민족과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폭력성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과거의 잔재가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같은 무력을 행사하는 전쟁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구글, 같은 기술 혁명이, 우리 생활에 침투해 들어와, 개인의 관심사나 위치 추적 같은 감시 시스템을 가동 중에 있다. 자신이 노출되고 조정당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더 위험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현실로 실현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독일 나치의 폭력성이나 조지오웰의 소설속 폭력성이 지금 우리에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이것이 폭력과 관련이 없다고 치부해 버리면 안 될 것이다. 첨단 기술은 알게 모르게 인간의 사고와 정신, 진리를 왜곡시켜, 공동체의 생활을 갈수록 획일화시킨다. 개성을 마비시켜 집단의 관심이 내 관심인 것 마냥 착각하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모바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기술 혁명에 따른 폭력성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 더 문제이다. 34장에서 토마스 만이 언급한 지식인들처럼 지금의 지식인들도 이 심각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며, 이것으로 이익을 취하기 위해 뒤에서 조정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퇴보와 진보 옛것과 새것, 과거와 미래가 하나로 착종 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작품 속 아드리안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예술의 방향성인 "동일성의 비밀"을 앞으로 어떤 현상을 받아들일 때, 통찰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Thank you, Th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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