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독을 하기보다는 한 권이라도 정독을 해야 된다는 독서가들의 말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새로운 책의 내용에 호기심이 생겨 한 번 읽고 마친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그렇게 실천한 것은 실제로 몇 권 없다.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으나 다른 글을 읽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단 그 충동과 새로운 책에 대한 호기심을 자제하고, 파우스트 박사 34장까지 두 번 읽고 있다. 역시나 처음 읽을 때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을 다시 깨닫게 되고 앞부분의 내용이 뒷부분과 연관되어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 34장이 주는 의미가 크다고 앞의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세 부분으로 나뉜 34장의 맺음 부분은 아드리안이 완성한 <묵시록>에 대한 내용으로 아드리안이 펼치는 음악 세계를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다. 이 지옥의 세계는 지옥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나라 독일에 대한 예언자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동시에 지금의 현실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을 창조해 내기 위해 아드리안은 수도원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방에서 놀라운 창작열을 불태우며 작곡을 했다. 이 정도면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슈퍼맨의 경지이며 자신의 명까지 온전한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누구든 어려웠을 것이다. 열정과 욕망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가까운 이웃이었거나 아니면 유사어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 계시록⎦을 소재로 한 오라토리오 구상, 이 은밀한 작업은 아드리안이 완전히 탈진한 듯한 시기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 후 불과 몇 달 만에 맹렬한 속도로 작품이 악보로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당시의 비참한 상태가 어쩌면 일정의 도피처나 은신처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주위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성가신 일을 당하지 않고, 철저히 차단된 상태에서... 보통의 편안한 상태에 사는 감히 그런 계획을 시도할 모험적인 용기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작품이 엄격한 규칙을 때리면서도 복잡한 기교와 정신을 담아 완성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아드리안은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감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매일 열 시간씩 작업했는데...
토마스 만은 아드리안이 창조해 낸 음악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통찰을 제시해 준다. 퇴보로 보이지만 그것은 또 다른 진보였으며, 옛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 새것으로 탈바꿈하게 되며, 과거가 곧 미래의 반영이라는 이 통찰은 우리의 삶, 더 나아가 세상에서 드러나는 모든 현상들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반복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음악 현상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화음 중심의 음악이 이런 음악을 작곡하는 형식으로 규정짓지 않았던 원시시대의 음악으로 회귀하여 진정한 다성적 음악을 동반한 풍부하고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드리안 레버퀸이 추구하는 예술세계의 지향점인 것이다.
가장 새로운 것 속에 가장 오래된 것이 다시 나타나는 방식으로 세상 이치가 돌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과거의 음악이 훗날의 음악에서 깨우친 리듬을 몰랐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성악은 언어의 법칙에 따라 운율을 취했고, 처음부터 일정한 박자와 리듬을 갖춘 시간적 척도에 따라 발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낭송의 정신에 따라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수도원과 다름없어 보이는 방에서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고립시켜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한 아드리안이지만 세상의 흐름을 읽는 힘이 있었다. 동일성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반복되고 그 안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아드리안은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아드리안이 세상에 완전히 오픈된 상태로 살았다면 이런 힘을 가지기 어려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주인 딸인 클레멘티네가 아드리안에게 책을 낭독해 주는데 그의 명민한 귀로 통해 듣는 이야기들은 바깥세상을 직접 경험하는 것 이상으로 그에게는 예술 영혼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것을 통해 그만의 작품 구상에 초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외부의 차단은 반대로 내재적인 힘을 기르고 안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수 있는 역설의 비밀이 여기에도 적용된 것이다.
클레멘타네가 낭독하는 부분은 메히틸트 또는 힐데가르트 폰 빙겐이 쓴 신앙의 신비 체험이었다... 아드리안은 전승된 모든 요소들을 예술적 종합을 통해 하나의 초점으로 집약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그런 문헌들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인류의 엄숙한 소명감에 따라 신의 계시를 생생하게 거울처럼 보여 줌으로써 인류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시민 문화를 해체할 반대의 극단은 야만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아드리안의 말에 참담한 회의가 생겼다.
아드리안은 옛 신비주의자들의 문헌인 예언서의 종말론에 심취했고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 그리고 단테의 시 에도 영감을 받아 그만의 "독창적인 묵시록"을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이 창조력을 통해 아드리안 또한 지옥을 경험할 정도의 고통으로 그 당시 독일의 상황을 음악으로 반영시켰다. 시민문화는 해체되고 공동체로 귀속하려는 회귀 본능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아드리안은 내다보고 있었으며, 종교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만들어진 종교음악은 문명화되기 이전 제사나 마법을 위해 쓰인 일종의 주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자신의 음악으로 보여준다.
개인의 극단적 고립에서 벗어나 공동체로의 귀속을 열망하는 난숙한 문화의 시대에 예배 의식을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 활용하는 수단들이 교회가 생활 윤리로 정착된 시대뿐 아니라 원시 시대에도 존재했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아직 음악이 되기 전 단계의 리듬만 지닌 원시적 마술 상태에서 부터 가장 복잡한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음악의 생생한 역사를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는 이 작품의 기본 이념은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그런 비난을 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기절초풍할 일은 글리산도 주법을 사람의 목소리에 적용했다는 것이다. 음악에서 사람의 목소리는 혼란스럽게 울부짖는 원시적인 발성에서 탈피해 음의 질서를 갖게 된 최초의 대상인 것이다. ⎡묵시록⎦의 합창대는 제7의 봉인이 개봉되는 순간 태양이 검게 변하고 달이 핏빛으로 물들고 배가 뒤집힐 때 절규하는 인간들이 모습을 소름 끼치게 형상화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형상화 방식이 곧 음악에서 원시적인 상태로의 회귀인 것이다.
아드리안의 <묵시록>은 이제껏 이어져온 음악적 전통과 관습들을 종합해 하나의 관통선으로 집약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 34장에서 토마스 만은 웅장하고 대담하며 섬찟할 정도로 예언자적 느낌이 나는 아드리안의 음악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런 아드리안의 예술세계는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예술의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 만이 창조할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아드리안은 이 작품을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묵시록>이 그 당시 독일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면 아드리안의 마지막 작품 <파우스트 박사>는 또 다른 접근을 통해 창조되었다. 다음 글에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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