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두 번 읽으니 다르다. 세 번 읽는다면 뭐가 또 다르게 읽히지 궁금하다. 처음 읽었을 때 몰랐던 부분 그리고 별 의미 없이 지나친 것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드리안의 마지막 곡인 <파우스트 박사>를 작곡하기까지 어떤 연결성을 가지고 진행되어 가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슈베르트페거와 아드리안의 관계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결론적으로 슈베르트페거의 죽음은 아드리안이 <묵시록>과 <파우스트 박사>를 작곡하는데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는 점이다. 직접적인 언급이 되지 않지만 아드리안의 친구로서 아드리안의 전기를 쓰고 있는 이 소설 속 화자의 말들이 그것을 은연중에 드러내 주고 있다. 슈페르트페거가 파멸되는 과정의 묘사는 독자인 나로 하여금 섬찟함까지 느끼게 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아드리안과 소설적 화자인 차이트블롬, 아드리안의 우정과, 슈페르트페거와 아드리안의 우정에는 뭔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순수하고 아드리안의 본연의 모습과 다르지 않지만, 후자와의 관계에서의 아드리안은 악마와 근접해 있다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 아드리안은 평소와는 다른 행동과 말을 슈베르트페거에게 한다. 이런 느낌을 직접적으로 글로 설명해서 이해시키기보다는 독자에게 애매함이 느껴지도록 작가는 묘사해 주고있다.
슈베르트페거에게 조력자의 역할을 떠맡긴 것일까? 느닷없이 함께 어울려서 소풍도 가고 썰매도 타자고 제안하는 것은 아드리안의 기질이나 평소의 감정에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던 것이다. 실제로 나는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이 아드리안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고...너는 다시금 과련 이 엘베 출신의 플라톤주의자가 과연 이런 계획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희생양을 제단에 바치듯, 아드리안은 친구 슈베르트페거가 바이올린 연주를 위해 필요한 곡을 만들어주고, 슈베르트페거는 아드리안의 작품을 통해 연주자로서 자신의 야망을 이룬다. 그 뒤 뭔가 계획된듯이 아드리안은 마리 고도이와 자신과의 결혼 성사를 위해 자신 대신 그녀에게 직접 가, 청혼해 달라고 슈베르트페거에게 부탁한다. 이 부탁을 할 때 거의 악마의 기운을 지닌 채 아드리안이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 장면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아드리안이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봐주게! 어쩌다 보니 결국 내 나이도 마흔이 되었어. 자네는 친구로서 내가 여생을 이 수도원 같은 데서 보내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지? 거듭 말하지만 나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라고. 때를 놓쳤거나 너무 늦었다는 일종의 불안감이 싹트면서, 따뜻한 보금자리를 가장 온전한 의미에서의, 반려자를 요컨대 보다 부드럽고 보다 인간적인 생활 분위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충분히 생길 수 있다는 말일세... 그리고 인간적인 내용을 그런 생활에서 확보하고 싶다네"...슈베르트페거는 몇 발자국 더 걸을 때까지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자네는 네 번이나 '인간'이니 '인간적'이니 하는 말을 했네.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세어봤지...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게 믿어지지 않고, 너무 어울리지 않아. 그래, 치욕스러워 보여.
결국 슈베르트페거는 아드리안의 요청과 달리 자신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 고도이에게 청혼하고 슈베르트페거와 불륜관계에 있던 이데스는 그를 총으로 잔인하게 살해한다. 사랑하는 친구의 배신과 죽음을 통해 아드리안은 충격을 받고, 이 일로 얻게 된 극심한 고통은 곡을 창작하는데 영감을 주고 작품에 영혼을 불어넣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 결국 이데스와 슈베르트페거의 욕망은 파멸로 끝이 나고, 아드리안은 악마에게 영원을 판 선물로 슈베르트페가가 죽은 1년 후 <그림이 있는 묵시록>을 완성하고 연주회를 갖는다.
창조적인 힘을 끌어내기 위해 십자가 위, 손이 못 박히는 고통쯤은 견뎌내야만 한다. 그래야 새로운 세상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창조의 힘도 결국 욕망에서 시작된다. 욕망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발현하기 위해서 지옥을 경험을 하게 되고, 그것은 파괴와 창조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신의 섭리이고, 우주의 기운이고 이치이며, 그렇게 반드시 흘러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악마와 파괴는 나쁘다고 인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악마와 천사라는 언어의 구분은 인식상 분별심을 유발하여 이분법으로 나누어 사고하게 된다. 그것이 마치 둘로 분리되서 존재하는 것 마냥 착각하게 만든다. 이제는 파괴와 창조 그리고 악마와 천사는 동전 양면과 같은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관점과 통찰은 책의 주요 관통선 중에 하나이다. 드디어 아드리안의 파국이 남았다. 그 대미를 장식할 <파우스트 박사> 작곡을 위한 또 다른 희생양은 네포무크 슈나이데바인, 아드리안의 조카이다. 다음글에 이어가도록 하겠다.
이런 상상을 나름 해봤다.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 또한 슈베르트페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고 부활 시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를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일종의 제물로, 유다를 사용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과연 악마적 요소가 없고 악이 완전하게 제거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신의 뜻이고 의지일까? 이런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 악은 늘 필요했고 앞으로도 악과 신은 늘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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