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과 그 형제들> 1권을 다 읽었다. 1권을 다시 읽은 후 2권을 읽을 계획이다. 본격적으로 요셉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은 쉽게 읽히지만, 서곡의 저승 나들이는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도 완전하게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성경에 대해서도 토마스 만은 히브리어 주해를 참고하는 듯하고, 신화적인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나오면 더 집중해서 읽어야 했다. 신화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요셉과 그 형제들>을 읽었으면 좋을 뻔했다는 생각을 해서, 조지프 켐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함께 읽으며 참고하고 있다. 이 책 또한 한 번 이상을 꼼꼼하게 읽어야 할 거 같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는 융 심리학의 근간인 인간의 무의식과 꿈은 아주 오래전 신화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이론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성인들인 예수, 부처뿐만 아니라, 옛날 신화 속 영웅들의 전설이 현대 문명에 어떻게 변용되어 전승되는지, 그리고 재생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켐벨 또한 인간의 집단이 만들어낸 ‘영웅 신화’는 예나 지금이나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하는 것이 신화라고 말한다. 이 신화는 인간 정신의 원천적 에너지이며 이 에너지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피력한다. 반갑게도 이 책의 번역자인 이윤기의 역자후기에 "시인적 본성은 심리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고, 심지학적 관심은 신화에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라는 '토마스 만'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그의 작품 안에는 <파우스트 박사>도 그랬고, <요셉과 그 형제들> 역시 신화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 속 인물인 요셉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1권의 서곡 "저승 나들이" 부분에서 작가의 관점을 알 수 있다. 조지 켐벨과 동일한 관점으로 과거를 비추어 현재를 바라보고 있으며,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가지기 위한 근거를 신화와 성경에서 찾을 수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존재는 항상 어디서나 늘 지금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설령 '옛날에 그랬다'라고 말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 비밀이 걸친 옷에 불과한 신화는 이렇게 '옛날에'라고 말한다. 그러나 비밀의 예복은 바로 축제다. 축제는 해마다 반복되면서 시간의 그물을 잡아당겨 과거에 있었던 일과 앞으로 생길 일을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의 일로 느끼게 만든다. 축제 속에 항상 인간적이 것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관습의 동의 아래 음란한 것으로 변질되고, 그 안에서 죽음과 생명이 서로 한 몸이 되었다 해서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 신화를 불러내어 그들의 눈앞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해주지 않는가! 죽음의 축제, 저승 나들이, 그대는 진정 하나의 축제이며, 육신에 갇힌 영혼에게 기막힌 즐거움을 선사한다. 영혼이 과거. 즉 무덤들과 경건했던 옛날에 집착하는 것은 괜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정신 또한 그대와 함께 하여 가슴 깊숙이 자리 잡기 바라니 부디 하늘로부터의 저 깊숙한 심연으로부터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이제 겁내지 말고 아래로 쑥 내려가자!
문학에 대한 독서량이 많아지면, 인간이 이제껏 살아온 삶의 패턴은 늘 유지되고, 단지 그 틀 안에서 다양한 변화를 가진다는 관점을 가지게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요셉 역시 오늘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태초의 인간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있었다. 요셉도 자신을 기준으로 먼 과거를 조망하며, 자신의 원형에 대해 상상을 한다. 6권의 작품들을 끝까지 읽지 않은 상태이지만, 짐작컨대 소설이 전개되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또 고난과 역경에 가로막힐 때 그것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의 지혜가 펼쳐질 것으로 여겨진다. 그럴 때 요셉은 이 과거의 이야기들을 자신의 현재 삶으로 끌어들여와, 자신에게 놓여있는 상황을 성찰하고 변용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게 될 것이다.
예전에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이 반복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체험은 그 옛날의 일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처럼 과거의 일이 눈앞의 일로 비중 있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일을 야기한 상황이 언제 어느 곳에서나 현실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위험을 경고하는 사람은 항상 있어 왔다. 그 징후를 읽고 현명한 예방책을 써서, 수만 명 중에 유일하게 타락의 길을 벗어난 지혜로운 자와 무척 영리한 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경우는 없다. 이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기록한 점토서판을 이 땅에 물려줌으로써, 미래의 사람들이 지혜의 씨앗으로 삼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행여 또다시 물이 넘칠 경우, 이 기록들이 뿌려 준 씨앗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리라 예견한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이러한 재난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언제 어디서든! 이것이 신비의 단어이다. 신비에는 시간이 없다.
위의 글이 토마스 만이 이 소설을 쓴 이유라고 생각한다. 신화와 성경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주요 기능은 단지 이것들을 과거의 것으로 묻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작가는 인간의 삶에서 반복되고 지속적으로 재생되는 고난과 희망, 욕망의 실현 등, 이것에 대응하는 요셉과 그 형제들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보다 나은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 이 소설의 지향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괴로움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으로부터, 우리가 세상에 무방비 상태로 던져져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이 있다. 이 옛이야기들의 해석이다. 이 해석을 글자 자체로 읽고 받아들인다면 크나큰 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축복"이라는 단어 역시 글자 자체의 의미가 아닌 다른 시각으로 이해하고 읽혀야 한다고 토마스 만은 말한다.
이들이 씨앗이 되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한마디로 자신은 축복받은 존재가 되리라는 약속을 얻은 것이다. '축북'이라고? 이 단어로 과연 남자의 얼굴에 인생을 살아가는 기본 정서에, 또 그의 자의식에 흔적을 남긴 사건들의 의미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축복'이라는 단어 뒤에 깔려 있는 가치 평가는 뭐랄까, 조금 특별해서, 우르를 떠난 이 남자와 같은 남자들의 기질과 활약을 이런 말로 묘사하는 건 왠지 거복 하다... 새로운 신의 영접으로 미래가 달라질 운명을 가진 그런 남자들을 선뜻 축복받은 남자라 표현하는 건 망설여진다는 뜻이다. 그네들이 삶의 의심의 여지라고 한치도 없이, 정말 말 그대로 순수하게 '축복'만 받은 삶을 의미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다... 이때의 신의 언약을 올바로 옮긴다면 어느 나라 말로 하든 이런 뜻이 될 것이다. '그것이 네 운명이 될지어다.' 이 운명이 하나의 축복을 뜻할 수 있는가 아닌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언제라도 다른 대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셉의 이야기는 조지프 켐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영웅의 모험'을 하는 또 다른 영웅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영웅의 영적 중심이, 소설에서는 요셉이 속한 공간으로 옮겨진 것이고, 요셉의 ‘영웅의 모험' 스토리는 다른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낙원을 경험하기도 하고 지옥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의지와 시도로 사투를 벌일 것이다. 이 낙원과 지옥의 경험이 결과적으로 성경에서는 영웅에게 내리는 '축복'이란 말로 함축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와 전승되면서 윤색되는 이야기들을 일차원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신'에 대한 개념을 다시 숙고할 필요성이 있음을 조지프 켐벨은 이렇게 전해준다.
인간적인 영웅은 후세 인간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하강'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본 영웅 모험의 의미이다. 그러나 전설을 만든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영웅들을 단순한 인간에 국한시키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들을 제한하는... 보통 사람에게서도 볼 수 있는 신념과 용기와 선약(仙藥)을 얻어 돌아오는 인간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전설을 만든 사람들에겐 탄생의 순간, 심지어는 잉태의 순간에 영웅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의 생애는 그의 모험을 결정적으로 하는 엄청난 장관으로 그려진다... 예수라는 영웅은 글자 그대로 본이 되는 전형이라기보다는 묵상해야 할 하나의 상징이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조지프 켐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중에서-
올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신화와 성경 속 영웅들의 삶을 받아들여야지, 쓰여있는 표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토마스 만도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는 히브리어 주해를 보면 ‘인식의 나무’로, 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의 아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가 아니라 하란이라는 지역 태생의 사람일 수 있다는 것, 이런 착오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변질되고 원전과는 달리 전승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읽고 듣는 사람들은 스토리의 맥락과 연관성을, 동시에 그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상징과 함축을 받아들여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옛이야기 속의 지혜와 그들의 삶을 내 삶에 투영할 의지와 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 만약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이 지금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삶의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과 지혜와 직관의 힘은 커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된다면 토마스 만의 의도대로 과거의 죽은 이야기는 다시 살아 숨 쉬게 되고, 그것들은 우리 삶의 시련과 고통을 함께 할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며, 보다 나은 삶을 제시해 주는 등대 같은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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