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과 그 형제들> 6권 가운데 1권을 다시 읽으면서 그냥 지나갔던 '신'들의 이름을 꼼꼼하게 찾으면서 읽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새롭게 안 사실은 그 신들이 수메르 신화에서 나오는 신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인류 문명이 수메르(메소포타미아)에서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다시 그것에 대해 찾아보면서 소설을 읽으니 처음보다 이해가 잘되었다. 문학을 한 번만 읽어 보고 그 작품의 내용과 깊이를 이해하려는 마음은 성급함과 자만심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서곡 뒤에 본격적으로 요셉과 그의 아버지 야곱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두 부자의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지는데, 이 둘의 대화에서 뭔가 '사고의 전화'이라고 할까.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고 성경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옛이야기 속의 상징과 은유는 삶의 본질을 꿰뚫는 힘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기 계발서나 수필을 읽으면서도 삶의 반성과 통찰이 오기는 하지만 뭔가 깊이가 문학보다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학이 주는 복선과 상징, 은유를 읽어내려면 '상상력'이 요구된다. 그 상상력을 기르게 해주는 것이 문학을 읽는 이유라 생각한다. 그 상상력을 통해 내면을 자극시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서 제시해 주기에 독서에서 문학은 핵심이고 본질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토마스만의 삶의 본질을 꿰뚫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오늘은 작품 속 그의 ‘상상력’을 통한 혜안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처럼 절제라고는 모르고 자신만만하게 그려낸 그의 명성은, 우리처럼 직접 눈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좀 혼란스럽고 거북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데 방해가 될 것이기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장된 평가가 뭐라고 소곤거릴 때 그 힘이 얼마 강력하진 보여주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거기에 귀가 솔깃해지면 기꺼이, 홀린 듯 자신의 눈을 가리게 된다... 명성에 순종하려는 인간의 욕구가 얼마나 강하면 그럴까!
"명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통은 이 명성을 얼마나 중요시하는가. 명성 있는 자의 능력과 그 명성에 좋은 품성이 함께 하게 된다면 그 명성에 걸맞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이 명성과 인성이 반대이거나 명성의 화려함과는 다르게 깊이가 얕아서 그 명성이 '빈 수레'인 경우도 많다. 우리는 명성을 쫓아 살아가기도 하고 명성을 가진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행동에 맹신한다. 이런 맹신은 스스로의 비판적 견지를 장착하지 못한 채 객관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상실하고 만다. 만약에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옛 성인들의 말씀 정도일 것이다. 심지어 부처님은 자신의 말도 맹신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쩌면 명성에 복종하는 인간의 욕망은 성경에서 말하는 일종의 '우상 숭배'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을 무조건적으로 맹신하는 태도를 경계하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우리나라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우상숭배'가 타 종교를 믿는 행위라고도 하지만, 성경의 의미는 무조건적으로 명성과 명예, 돈, 부를 쫒으며 사는 사람들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아차 하는 순간에 고자질을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요셉도 이런 것이 자기한테 이로울 게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어떻게든 이런 좋지 않은 기질을 통제하고 싶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속 시원하게 다 털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잘 참아냈었다...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절제 같은 건 몰라서 무턱대고 자신만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자신을 감출 생각이 없으므로 당연히 침묵도 모른다. 자신을 알려 세상의 관심을 끌고 싶을 뿐이다. 감정이 넘치는 사람의 무절제가 바로 이런 것이다.
어린 요셉이 고자질하는 성향은 감정의 무절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런 심성은 ‘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신’역시 감정적이며 절제가 없고 기분 내키는 대로 변덕을 부리기에 신이 인간을 선택할 때는 신의 감정이 중요하지, 인간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신’의 결정이 터무니없더라도 이것에 대해 인간은 대항할 힘이 없다. 가끔 살다 보면 이런 생각을 누구든지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공평한 ‘신’이 아니라는 것을. ‘신’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로 보인다. 아무튼 '신에게 선택받은 자'인 어린 요셉은 절제 없는 고자질쟁이였다. 앞으로 이 요셉의 무절제한 감정에서 나온 행동으로 인해 초래된 위기상항이 닥쳐올 것으로 보인다. 초반이라 아직 이런 잘못된 행동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한 챕터를 고자질쟁이로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면 요셉의 삶 가운데 하나의 원인을 제공할 것으로 상상하게 된다. 인간의 고자질은 형제 사이에서부터 사회에 나가서 까지 고자질하는 무절제한 행동에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하다. 사실 이 대목을 읽기 전에 제삼자에게 상대방에 대한 약간의 비방이나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야겠다는 결심을 스스로에게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잘되지 않는 나의 절제심 부족에 실망하고 있었던 차였다. 소설 속 어린 요셉이 무의식적으로 이것이 자신에게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신한테 이로울 것이 없다는 글을 읽고, 다시 한번 나의 무절제한 반복된 행동에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 이 고자질은 중상모략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데 토마스 만은 이것에 대해 예리하게 짚고 넘어간다.
요셉이 상상해 낸 이야기에 일말의 진실이 있기라도 한 듯. 중상모략이긴 하나, 백 퍼센트 거짓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고, 조금은 진실이 담긴 그런 비방에 더 펄펄 뛰는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고자질은 진실이 어느 정도 포함 될 수 있기에 이것을 중상모략이라고 역으로 항변하는 상대에게 무조건 후한 점수를 줘서도 안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신'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사랑했고 자랑스러워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게 하는 그런 아버지였다. 야곱은 엄숙함과 고상함을 두루 갖추었고 자주 사색에 빠졌는데 이 사색은 최고의 지성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이질적인 생각들을 결합시키려는 본성이라고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은 기민한 "상상력"의 발로일 것이다.
서로 비슷하여도 상응하는 것들이다 싶으면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서로 한데 엉켜, 과거의 것과 예고된 것이 지금 이 순간의 일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럴 때면 뭔가 골똘히 생각할 때 그렇듯 눈동자까지 이리저리 헤매곤 했다... 그래서 야곱이 살던 시절만 해도, 고귀한 정신적 품격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라 하면, 많은 신화를 기억해 내어 서로 결합시킬 수 있으며, 이 연상 작용의 결과물이 강한 설득력을 갖는 사람을 뜻했다.
인간이 지닌 본성의 하나인 '두려움'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 이어질 것이라는 상상을 통해 나온 공포심인 것이다. 즉 이 '두려움'에도 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흔한 두려움은 과거의 트라우마로 예전 상황이 다시 올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이런 보통의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중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고귀한 정신적 품격을 지닌 사람은 깊은 사색과 명상을 통해서 자신을 성찰할 줄 안다. 신화나 역사 혹은 자신이 경험한 과거가 반복되는 패턴으로 이동하여 미래로 재생된다는 것을 통찰하는 능력인 ‘상상력'을 지닌 사람인 것이다. 야곱은 이런 고귀한 정신의 신성을 가진 인물인 것이다. 만약에 과거의 야곱이 이런 고귀한 품격을 지녔다면 지금의 우리 또한 이런 고결한 정신에 대한 본질이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자신의 신성을 인정하려는 의지도 없고 믿음조차 없다. 아니 없다고 부정까지 한다. 안타깝게도 두려움이 먼저 앞서고 자신을 성찰할 여유가 없다.
토마스 만처럼 소설 속 인물을 창조하는 작업의 성과는 과거 신화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을 예민하게 통찰하는 ’상상력‘을 통해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사가 반복적인 패턴으로 재생된다는 것을 간파하기에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토마스 만도 야곱이나 요셉처럼 ‘고귀한 정신적 품격’을 지닌 사람 중의 한 명일 것이다. 한 마디로 ’’상상의 대가‘‘인 것이다. 우리 또한 야곱과 요셉의 신성이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드러내지 못하는 주위의 상황과 관계들에 얽혀 잠식되어 영원히 망각한 채 대부분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와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이득과 그 역할을 바로 이것이다. <요셉과 그 형제들>처럼 내면의 '신화' 유전자를 끌어내어, '고귀한 정신적 품격'을 지니고 살아가기 위한 ’‘상상의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이런 ’ 상상력‘을 자극시켜 사고의 깊이를 더해주어 삶을 값지게 만들어 주는 위대한 작가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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