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서 토마스 만은 문장과 문장 사이 생략된 간극의 내용이 많은 성경의 해석을 통해, 놀라운 상상력과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이런 예리한 통찰력이 실제로 성경에 생략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성경을 읽고 있지만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히브리어로 된 원전과의 차이는 당연히 있을 것이고, 이미 유태인인 모세가 구약을 썼을 때부터 자신의 민족에 대한 해석을 어느 정도 유리한 입장에서 기록 했을 것이다. 글과 글 사이에 여백들과 단어들이 여러 언어를 거치며 해석하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류나 착오 혹은 윤색이 가해진 결과물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체 왜 하나님은 굳이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강조했는지 그것을 먹으면 어떻게 되길래 그것을 못 먹게 막았는지 이유나 설명해 주고 쫓아냈으면 억울하지나 않았겠다 싶다. 가타부타 뭔가 말을 정확하게 하시지 않는 하나님으로 보인다. 그리고 카인이 아벨을 죽였는데도 카인의 행동에 침묵한다. 또 하나님이 내리는 축복은 토마스 만이 말한 대로 축복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축복은 결국 저주와 혼재하고 일맥상통한다. 야곱이 그러하다. 형 에사오를 제치고 아버지 이사악을 속여서 받은 축복으로, 집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그 여정은 시련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종교 학자이신 '오강남' 박사님의 유튜브 강연을 들어 보면 한글로 쓰여있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과 멀어진다고 이야기한다. 불교 교리에서도 "불립문자" 즉 언어 자체만을 가지고 설명하고 문자가 지니고 있는 형식과 틀에 집착하거나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성경에서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옛 글을 통해 세상과 삶의 본질을 삶에 적용시키는 지혜를 얻기 위해, 상상력이 있어야 하며, 그것으로 통찰할 수 있는 힘이 길러져야 할 것이다. 토마스 만은 그것이 어떤 힘인지 자신의 글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글에도 여백은 많다. 그것이 문학이 주는 이점이며 문학을 접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 그런 것 때문일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성경 이야기 사이에 벌어지는 것들을 메꿔 이해시켜 주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인물의 생각등이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작가는 독자에게 가교 역할만을 하고 있다. 이 다리를 건너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이것을 건너기 위해 요구되는 힘이 상상력이며, 이것을 거쳐 지혜로운 삶의 여정을 위한 트리거가 통찰력인 것이다.
오히혀 상황은 그 반대다. 에사오가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택한 이유는 자신이 받은 신화 교육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화의 도식을 따르려는 순종심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에사오는 무척 거친 사람이지만, 동생 야곱과 자신의 관계를 예정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경우 두 형제의 관계는 이 땅에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현상의 반복과 재현이다.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고 현실도 다시 나타난 이 현상은 바로 타인과 아벨의 관계였다.
인간은 시간의 자녀들이다. 따라서 시간은 자녀들이 자신 위에 올라서지 못하도록 잡아먹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삼킨 것을 다시 토해내어 자신의 자녀들이 옛날 이야기에 등장한 주인공들과 똑같은 삶을 되풀이하게 해 준다.
'이미 있었던 현상의 반복과 재현'의 의미가 주는 통찰은 무수한 삶의 변화 안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말이다. 봄이 오면 늘 여름이 오고 사계절이 하나의 패턴을 가지고 반복된다. 큰 틀 안에서 그러하지만 꼭 입춘에 맞춰 봄이 정확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서서히 찾아온다. 그리고 장마철에 어느 해는 폭우가 쏟아져 예상치 못한 피해를 보는가 하면 어느 해는 비가 조금뿐이 안 내려 가뭄이 들어 고생한다. 이렇게 무수한 가능성과 다양성에 묻혀 장마가 끝나고 해가 쨍쨍하게 내리쬐는 날이 올 것을 망각하고 두려움과 공포심을 가지게 된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은 늘 과거와 연결성을 인식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어쩌면 토마스 만이 상상 한대로 그때 그 당시 사람들은 어쩌면 '나'라는 자의식 자체가 지금보다 강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결정할 때 과거의 사람들과 동일이 하며 자신의 지금 행동의 방향성을 과거의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독자로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때로는 삶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순간에 그 과거의 재현이 명쾌한 답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똑같은 방식으로 과거가 재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삶이 정확하게 지시하거나 이쪽이 맞다. 라고 답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어떤 기준과 태도로 끌고 갈지 자신만의 상상력과 통찰력이 요구되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조지프 켐벨의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말한 "영웅의 모험"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십자가가 등에 있음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기꺼이 그것을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어야 한다. 요셉도 그럴 것이고 아버지 야곱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야곱은 그 시절 대단한 자부심으로 한껏 고조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교양 있는 인물이며, 고결한 영혼을 지녔음을 확신했다. 이는 여러 가지 이념들을 폭넓게 결합시킬 줄 아는 데서 비롯된 결과였다. 돌이켜 보면 그의 삶 또한 우주의 순환이 그러하듯 지난 25년간 승천과 저승순례, 뒤이어 부활을 겪었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은 순환의 비유로서 신화의 도식을 만족스럽게 실현시키며 부자가 된 삶이 아니던가... 처음 벧-엘에 이르러 그 성소애서 거룩한 계단을 보았으나 이것은 곧 승천이었다. 거기서 아랫세상의 초원으로 내려갔으니 이것이 곧 저승 순례였다. 여기서 7년씩 두 번이나 땀을 흘리며 온몸을 떨어야 했고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다.
위의 ‘부자’가 되었다. 라는 말이 뭔가 좋게 들릴 수 있지만 끝이 아니다. 야곱은 세겜에 도착해서 자신의 장인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장인과 다르지 않은 생각과 행동의 도식을 경험한다. 한마디로 저주와 축복이 반복해서 이어지는 삶으로 보인다. 이게 끝인가 싶으면 또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야곱은 어떻게든 그것을 헤쳐나가야 했다.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그런 상황에 놓이고야 만다. 저항해 봤자 수렁으로 들어갈 뿐이다. 그 수렁을 극복하면 축복이 되는 것이고 영광스러운 순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토마스 만은 한 인간의 삶에서 결과가 슬프게 끝나더라도 그 과정 속에 영광스러운 순간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힘은 한 인간을 성장시키는데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야곱의 형인 에사오는 섣불리 자신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아버지 이사악의 축복을 받기 전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알렸던 것이다. 그것은 하녀를 통해 그의 어머니 리브가에게 전해졌고 결과적으로 주인공 영웅의 역할은 에사오의 동생 야곱에게 돌아간 것이다. 영웅의 역할을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운도 따라줘야 하고(신이 편을 들어줘야 한다), 걸맞는 그릇이어야 한다
영웅이 되려면 과거 원형을 통해 지금 처해 있는 상황과 연결하는 상상과 통찰의 힘이 필요하다. 야곱은 어떤 굴욕에도 굴욕 당하지 않는, 저 가슴 밑바닥의 저주를 축복의 은혜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힘이 있었다. 그 힘은 과거 신화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야곱과 요셉의 ’영웅모험’ 이야기로 부터 삶의 모험을 위한 공포나 두려움을 어느정도 내려놓고 삶의 여정을 떠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모두 읽은 후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면 ‘영웅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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