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록

미카엘 하네케 <피아니스트> (feat. 토마스 만)

Christi-Moon 2024. 2. 11. 15:05

미카엘 하네케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 하나는 독일 작가 토마스 만과 어딘가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그 둘의 공통점은 독일 출신이라는 것 외에도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세상을 통찰하는 대단한 능력자들이며, 그 두 대가의 영상과 글들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 내재되어 있는 에너지는 폭발적이나 그 에너지가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는 것 또한 두 사람의 매력이다. 드라마 구성이 논리적이고 빈틈없이 짜 맞춰져 있는 느낌을 받지만 반대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들도 있다. 이 두 대가는 무의식의 세계를 중요시하고 재생과 반복되는 패턴의 연속적인 삶을 알고 그 안에서 인간의 삶을 통찰한다. 두 사람 모두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지닌 따뜻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과 명성을 다 거머쥐었다 하더라도 세상의 평가로 그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가볍게 느껴질 뿐 그들의 영혼은 남다르고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만의 < 요셉과 그 형제들>의 요셉처럼 이 둘은 그야말로 신에게 '축복받은 자'임에 틀림없다. 이 '축복'의 의미가 흔히 생각하는 '축복'이 아니라는 것은 토마스 만의 작품을 읽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치열한 자기 성찰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자,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신성의 기운을 지닌 자, 이 힘을 가진 자가 축복'을 받은 자다. 그들은 '대가'의 영역도 뛰어넘은 '대가 중에서도 대가' 그야말로 Suremaster들이다.
 
미카엘 하네케의 작품들은 대부분 자신이 각본을 쓰고 감독을 했지만 <피아니스트>는 200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이 영화는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과 남우 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는데, 여주인공 이자벨 위페르는 이 영화를 통해 세계 최고의 연기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배우는 좋은 감독을 만나야 자신의 재능을 역량껏 펼칠 수 있다. 좋은 감독과 시나리오가 있은 뒤 좋은 배우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미카엘 하네케의 섬세하고 뛰어난 연출력의 신뢰를 믿고, 배우들은 온전히 그 역할에 몰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좋은 감독과 작품을 해보는 것이 배우들의 바람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연기술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시나리오와 능력 있는 감독과 작업한 이자벨 위페르가 부럽다.

*영화 속 이자벨 위페르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 에리카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교수이다.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고, 엄마와 단둘이 살아간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직도 딸을 과보호하고 딸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억압하고 간섭하여 이것에 저항하는 딸과 심한 몸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이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에리카는 공적인 자리에서 존경받는 피아니스트이며 유능한 선생이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정상적 것과 거리가 먼 행동을 하면서 자신을 학대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성행위에 쾌감을 느끼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이런 그녀에게 피아노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공과 대학생 발터는 에리카에게 한눈에 반하고 그녀에게 구애한다. 발터는 사랑의 행위를 요구하지만 에리카의 성적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낀 발터는 괴로워한다. 정상적인 성행위가 아닌 강압적이고 자학적인 성행위를 발터에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억압과 간섭으로 남자를 사귀는 것이 통제되어 늘 엄마의 명령대로 움직였기에 음지에서 해소시킨 성적 욕구는 건강한 성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그녀의 성적 요구가 담긴 편지를 읽은 발터는 그녀에게 실망하고 화가 난 발터는 밤중에 찾아와, 편지에 쓰인 에리카의 요구대로 그녀를 때리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한 후 그녀를 팽개치다시피 하고 떠난다. 사랑으로 인한 질투심과 피아노에 대한 집착으로 제자의 손을 다치게 하고, 그 제자 피아노 공연에 자신이 대신 연주하기로 하던 어느 날, 그 공연장에, 에리카는 발터를 애타게 로비에서 기다린다. 그리고 그를 만났지만 그런 에리카를 발터는 조롱하는 태도를 보이며, 객석으로 사라져 버린다. 뭔가 모를 공허감과 외로움에 사로잡힌 에리카는 미리 집에서 준비한 칼로 자신의 어깨 부위를 찌른 뒤,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또한 어린 시절 받은 강한 억압은 정상적인 어른이 되는데 큰 장애가 될 수 있음에 경각심을 가지게 한다. 부모의 바람대로 자식이 사회적 성공을 얻을지 모르지만,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음을 이 영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회적 지위를 얻었다 하더라도 극복되지 못한 어린 시절 내면의 상처는 자신을 파괴시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 해를 끼치는 범위까지 확대될 수 도 있음을 영화는 경고한다.
 
미카엘 하네케는 이 작품에서도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한 감정을 들게 하는 잔인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 속 에리카 모녀의 스토리가 현실과 괴리된 상황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외부적 상황이 다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문제의 본질은 주위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자식의 성공이 부모 자신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말이다. 현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강하게 각인시키기 위해 미카엘 하네케는 불편한 요소들을 과감하게 영화 속에 그려냈을 뿐이다.

에리카는 어른들의 희생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문을 열고 나온다. 어려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주어진 현실을 미화시키지 않고 객관적으로 철저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주어진다. 그리고 문제의 심각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지를 '스스로 낼 때' 만이 자신의 동굴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리카에게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어깨를 찌르고 감옥과 다름없었던 연주회장의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오는 장면은, 자신의 동굴에서  벗어나려는 시작의 신호탄으로 느껴졌다. 피아노와 그녀는 하나였다. 이 영화 속 피아노의 상징은 에리카의 사회적 지위를 확인시켜 주는 출구였으며, 그녀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발터를 연결해 주는 중요란 매개물이었다. 에리카가 피아노 연주를 포기했다는 것은 이것들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은 미카엘 하네케의 그 어떤 영화 보다도 강렬하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의 감옥에서 용기를 내 탈츨 하라고.  

* 미카엘 하네케, 피아니스트 엔딩 장면


우리는 진정한 삶의 가치인 '자유'를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보물이 단지 돌에 불과함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과감히 던져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를 지니기까지 쉽지 않은 삶의 여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의 주인공 요셉은 자신을 시샘하는 형들에 의해 갇히게 된 우물 안에서 형들을 미워하거나 신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과거 행동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했다. 요셉이 빠진 깊은 우물은 이제껏 요셉이 받은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으로 인한 보호의 껍질을 깨고, 어린 요셉이 아닌 진정한 어른으로 재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에리카 역시 남들에게 자신을 늘 좋게 포장시켜 준 피아노 연주의 포기는 또 다른 삶을 살아내겠다는 의지의 발로일 것이다.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대부분은 세상에 주는 경고와 희망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불편함으로 포장시켜 버린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보는 내내 불편하다. 희망은 없어 보이고 절망이 난무할 뿐이다. 그 절망은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경고를 넘어, 잔인한 장면도 많다. 감독의 의도는 극을 통해 관객을 강렬하게 각인시키고 자극받길 원하는 것 같다. <피아니스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우리의 삶도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런 잔인한 영화와는 다른 현실을 우리가 살고 있다고 주어진 현실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착각으로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질을 읽지 못하기도 하고, 포장된 세상에 뭔가 불편함은 인식하지만 저항하지 못한 채 말이다.

위대한 영혼들은 잊지 않고 이런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알려주면서 용기와 개선의 의지를 실행하라고 상기시켜 준다. 깊고 어두운 우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고, 갇힌 감옥에서 과감히 탈출할 수 있는 용기는 온전히 스스로의 몫임을 말이다. 우물에 가끔 빠지곤 하는 나에게 미카엘 하네케와 토마스 만의 영혼은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 준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