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하네케가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한 <하얀 리본>은 62회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 67회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22회 유러피안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등을 수상한 2009년 작품이다. 독일의 시골 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이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3년, 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시작은, 예전 이 마을에서 일했던 선생님의 내레이션을 통해 전해준다. 이 마을 의사가 자신의 집 앞에 누군가 설치해 놓은 줄에 걸려 다치는 낙마 사고를 시작으로 이 고요한 마을에 원인 모를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드러난 하나의 현상들이고 이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원인들이 이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음이 차츰 밝혀진다.
시골의 작은 마을, 말을 타고 집에 돌아오던 마을 의사는 그를 겨냥해 쳐 놓은 줄에 말과 함께 걸려 부상을 당하고 타던 말은 죽게 된다. 이 사건의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경찰이 동원되지만 결국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내지 못한다. 소작농의 아내는 그 마을의 지주인 남작 소유 제재소에서 일하다 마루 바닥이 꺼지는 바람에 낙마하여 죽게 되는데, 이 사고로 화가 난 소작농의 아들은 남작의 밭에 분풀이를 한다. 하지만 남작 밑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소작농은 아들을 크게 나무라며 결국 얼마 안 있어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한다. 이 마을 지주인 남작 집도 평화롭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남작 부인은 남편 몰래 외도를 하고 그 사실을 남작에게 까지 말할 정도로 부인은 자신의 남편에 대한 뭔가 모를 불만과 분노를 지니고 있다. 또 남작의 아들은 누군가에게 맞고 집으로 들어온다. 오래전부터 의사와 불륜이었던 그 동네 산파는 그 의사의 자식으로 보이는 장애인 아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아들의 두 눈을 누군가 파내는 끔찍한 일까지 생기게 된다. 영화는 이런 미스터리한 사건이 마을에 연달아 일어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불편함과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마치 더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시작도 이런 불운들이 보태져 도화선이 되었을 것이라는 예측을 관객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카엘 하네케가 주로 전하려는 메시지 중 하나가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에 대한 고발이다. 폭력성이라고 하면 특정한 사람이 하는 거친 행동의 일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 <퍼니 게임>에서도 뜻하지 않게 죽음으로 내몰린 인물들 또한 피해자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는 그들도 가해자였다. 우리 모두에게 그 폭력성은 내재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땅 위 개미도 장애물이 나타나면 사력을 다해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어렸을 때 개미떼를 보면 가는 길목에 개미가 못 다니게 막으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살면서 타인으로부터 받았던 억압을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폭력성을 표출하곤 한다. 그것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인간의 폭력성은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
이 영화에서는 폭력성이 대물림으로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얀 리본>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폭력성이 없어야 되는 직업인 의사 목사 산파, 이들이 이 작품에서 가장 폭력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줄에 걸려 낙마한 의사는 부인과 사별하기 전 산파와 불륜을 저지르고, 장애아를 낳고 그 산파에게 심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게다가 의사는 부인이 죽은 후 자신의 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까지 한다. 목사는 자신의 직업으로 인한 권위와 도덕성을 자신의 자녀들에게 강요한다. 자신의 자녀들이 아이들로서 할 수 있는 실수를 도가 지나칠 정도로 엄하게 다룬다. 사춘기 아들의 성적 호기심에 대해서도, 이해와 배려는 조금도 없다. 하얀 리본으로 손을 묶어 속죄하게 하고 회초리로 엄하게 다룬다. 산파도 의사와 다르지 않다. 의사를 향한 산파 자신의 욕망과 집착에 대한 억누름은 다른 이웃집 아이에게 뺨을 갈길 정도로 폭력성을 분출한다. 심지어 이 작품의 화자로 나오는 선량해 보이는 선생님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 후반부,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 한 명을 의심하여 경찰을 불러 조사받게 하는데, 이 여학생 말을 전혀 신뢰하려고 하지 않는다. 선생으로서 학생에 대한 배려는 없어 보인다.
이런 어른들의 폭력성은 어렸을 때 자신들도 어른들에게 억압을 당했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휘두르는 어른들의 폭력성은 그들도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자신의 이웃으로부터 경험한 억압이 시발점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 영화 속 아이들에게서도 그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의사 아들 어린 루돌프는 낙마한 아버지를 걱정하며 누나와 대화하는 장면에 식탁 위 접시를 바닥에 내쳐 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분노를 분출한다. 목사 자녀들은 아버지의 억압에 못 이겨 자살을 시도하고 아버지가 기르는 새를 죽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받았던 억압은 어른이 되어 약한 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억압이 크면 클수록 그 폭력성은 비대해질 것이며, 비대해진 폭력성이 보태지면 세상은 파멸에 다다를 것이다. 즉 개인이 받은 억압은 대를 이어 폭력성으로 드러날 것이며, 이렇게 더해진 폭력성은 전생이라는 참화까지 겪게 됨을 이 영화를 통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 자신의 폭력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폭력성이라고 붙여지기에 적합한 행동들을 내 딸에게 무의적으로 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니 오싹해졌다. 그리고 어린 시절 부모님이 나에게 했던 행동들에 대한 기억의 파편들이 폭력이라는 꼬리표를 달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이런 폭력성을 면밀히 드려다 보면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잠을 푹 자지 못하고 몸이 피곤하면 그 불편함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괴로움을 표출하기도 한다. 상대방에게 무의식적으로 말을 험하게 하거나 평상시 하지 않는 행동들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중에 그런 말과 행동에 대해 후회하고 반성할 때가 있지 않은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이다. 이런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력이 있다면 사실 건강한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하얀 리본>은 타인의 행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고,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게 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늘 깨어있기"를 작동시켜 자신의 폭력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면 보다 건강한 사회로 확장시킬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측면에서 미카엘 하네케 작품을 무조건 어둡고 폭력성이 난무하는 영화라 판단하는 것은 좁은 시야로 그의 영화를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미카엘 하네케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들에게 경고할 뿐이다. 막연하게 폭력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악으로 치부하며, 마치 선한 나와 폭력은 거리가 먼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음에 대한 경고이다.
폭력성은 누구에게나 있고 언제든 분출될 수 있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명확히 알고 있을 때 컨트롤이 가능하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않다면, 조절 능력조차 작동하지 않아 폭력과 억압은 언제든 재생되고 반복될 것이다. 자신이 깨어 있을 때만이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나아가 건강한 사회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 없는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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