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록

나의 인생 멘토 (feat. 법륜스님)

Christi-Moon 2024. 3. 3. 07:51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지성인이며 종교 지도자, 철학자이며 인도주의자 박애주의자를 꼽으라면 단연코 법륜스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절에 앉아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설법을 하는 스님들도 훌륭하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혼자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도 물론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법륜 스님처럼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개인의  각각의 애로사항을 듣고 그것에 답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내공과 에너지가 요구될 것이라 여겨진다. 법륜스님이 하시는 즉문즉설을 통해 나 또한 개인적으로 이제껏 삶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벗어나는데 도움을 받았다. 직접적으로 법륜스님에게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유튜브를 통해 다른 이들의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주시는 법륜스님의 삶에 대한 통찰은, 귀감이 되고 삶의 방황에서 헤매던 나를 끌어주고 바로 서는데 큰 힘이 되었다. 스님이 내신 <금강경 강의>와 <반야심경 강의>를 읽어보면 어려운 경전을 아주 쉽고 명확하게 읽히기 쉽도록 써놓으셨다. 읽어내기 어려운 경전을 쉽게 쓸 수 있다는 것은 그아먈로  경전의 내용을 통달하고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법륜 스님의 불심의 깊이는 즉문즉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스님은 명확하게 본질을 꿰뚫어 보고 답을 내려 주신다. 스님들 중에서도 법륜 스님의 불성은 단연코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법륜스님의 저서 <지금 여기 깨어있기> 또한 그 어떤 자기 계발서 보다 삶을 보다 자유롭고 지혜롭게 살 수 있는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책일 것이다. 머리가 복잡하고 어떤 것에 매달여 전전긍긍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아주 유용하리라 본다. 요즘 나 또한 어떤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머리가 산란하고 걱정과 두려움이 큰 상황에 처해 있다. 물론 법륜스님의 말씀을 들어왔고 독서와 과거 삶의 경험을 통해 내공이 쌓였다고 하더라도 그 내공으로,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보다 자유로워지고, 평안을 찾기에는 아직 갈길이 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뭔가를 바라면 바랄수록 그것은 집착이 되고 욕망이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그 집착으로 괴롭기 시작하고 마음이 불편한 채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 집착하고 있는 문제와 일이 해결되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한 곳에만 매달려 시간을 낭비하며,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지금 중요한 일들을 놓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내가 딱 그러한 상황이라는 자각을 그제 어제 법륜스님이 쓰신 <지금 여기 깨어있기>를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법륜스님의 책 속의 말씀들은 지금 주어진 내 상황의 혼란함을 정리하는데 보탬이 되었다.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가. 이런 종교 지도자가 우리나라에 현존하고 계시다는 것으로도 든든하고 위안을 받는다. 물론 부처님이 누구도 의지 말고 자기 자신만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하셨지만, 부처님과 가장 닮은 분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하다. 늘 즉문즉설을 들을 수 있고, 법문을 우리 삶에 적용해서 쉽게 읽히도록 쓴 스님의 책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일을 열심히 하는 제 모습을 스스로 돌아보고 무엇에 집착하는지 살펴보니 욕먹는 것을 굉장히 경계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적당히 게으름 피우다가 나중에 신분이 밝혀지면 '그 사람 우리 절에 와서 부목 할 때 보니 농땡이나 치고 형편없는 사람이더라.' 이런 소리 들을까 봐 자기를 내려놓는다 하면서도 내려놓지 못하고 죽기 살기로 일했던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늘 자기를 꽉 움켜쥐고 삽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떤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늘 과정에 집착해서 자기 합리화를 거듭하다가 결국 목표 달성을 못 할 깨가 많습니다. 결국은 장소만 바뀌었지 삶의 방식은 똑같은 거예요.  

 

위의 법륜스님 체험 글은 자칭 성실한 사람들, 성실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성실한 것이 아주 좋은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남에게 험잡히기 싫어하고,  반듯한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명예심이고 집착에 불과할 수 있다는 좋은 예로 보인다. 자신이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을 괴롭히거나, 자신보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성실하지 못한 이들이 자신보다 잘 나갈 때 세상의 불평등을 떠올린다면 이것은 성실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것에 불과한 것이다. 나 또한 이런 착각을 많이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성실도 지나치면 집착이 된다는 것을 알기만 해도 삶은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큼 이 무엇인지 알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이 한 생각을 내려놓아야 삶이 가벼워질 것이다. 이루고자 열망하는 일에 대해 집중하고 그로 인해 주위를 둘러볼 여유 없이 살았던 나를 반성하고 돌아보게 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바람직한 마음가짐은  ‘공부한다’라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이 말이 정확히 맞다. 공부라는 것은 어디서든 배우게 된다는 법륜스님의 말처럼 오히려 힘들게 경험한 것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었다. 실수와 실패한 일들로부터 삶의 통찰과 지혜가 생겨났던 것 같다. 물론 아직까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두려움이 작지 않다. 지금 현재 내가 몇 개월간 해내야 되는 일 또한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예전보다는 크지는 않다. 감사하다. 이제는 '올 것이 또 오고야 말았구나. 그런데 이것을 어차피 피하지는 못할 것이고 이 일은 내 삶의 수행으로 아니면 공부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라고 마음 고쳐 먹으니 한결 가벼워졌다. 일을 하면서 힘들어하는 내 마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관찰하게 되었고 그것들이 집착에서부터 나온 것을 인식하며, 그 집착을 가볍게 털어내는 여유가 조금은 생겼다. 다른 방법을 구상해 보고 또 다른 대안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풍요로운 삶’이라는 말이 물질적 안정과 굴곡 없는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틀에 가두어 세상의 잣대로 살아가는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쟌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조르바 야말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조르바이고 싶었던 니코스 카쟌차키스의 묘비명은 진정한 풍요로운 삶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자유롭게 사는 것인지 명확하게 제시해 주는 글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Den elpizo tipota)
그래서 두려워할 것이 없어(Den forumai tipota)
그러기에 나는 자유로워 (Eimai eleftheros)

 
살면서 누가 괴롭게 살기를 원하겠는가? 늘 괴로운 삶을 피해 가기 위해  돈을 벌고 학벌을 높이고 명예를 얻기 위해 고전분투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삶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잘 산다고 사는 것이 오히려 함정이 되고, 덫이 되어 자신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되고 마는 형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법륜 스님의 <지금 여기 깨어있기>는 이런 삶을 명징하게 보고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대한 오류를 깨닫게 해주는 빛과 다름없다.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우리 옆에 있어서 언제라도 그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삶을 떠나서 다른 허공을 쫒거나 죽은 뒤는 쫓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와 종파를 떠나서 내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공부입니다. 현재의 삶 속에서 그런 공부를 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지금 여기 깨어있기! 이처럼 중요한 삶의 화두가 어디 있겠는가. 법륜스님에게 감사한 나의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