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록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와 데이비드 봄 (feat. 관찰자)

Christi-Moon 2024. 4. 29. 08:11

뭔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생기는 두려움, 늘 나도 모르게 떠다니는 수많은 생각들, 외부의 영향으로 생기는 감정들 나 스스로가 특별하다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하다고  인식하며 살았던 삶. 그런 삶은 늘 반복되었고 무엇이 문제인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살았었다. 아니 문제라고 의심 조차 해보지 않았다. 이런 나를 성찰하고 헛된 삶의 방향성을 바로 잡아보고 싶었다. 늘 과거를 볼모로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에 대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불안감으로 전전긍긍하는 나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싶었다. 내 삶의 잘못된 방향성을 수정하고 싶었다. 이제껏 삶의 틀 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다. 새벽에 일어나 요가와 명상을 하고 올바른 호흡을 하기 위해 공부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게 되었다. 책과 예술작품들을 통해 위대한 영혼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들을 글로 정리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 이제껏 삶을 돌아보니 긴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짧은 시간에 이 습관이 형성된 것은 아닌 것에 감사하고 지금까지 실천 중이다. 요즘 데이비드 봄의 글들을 접하면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또 다른 변화가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고' 흐름의 원천을 인식하고 그것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져 통찰력을 키우는 것이다. 쉽게 길러지지 않겠지만 지속적으로 해보면 조금씩 변화가 생기리라는 믿음은 가지고 있다.
 
데이비드 봄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직접 만나 자신의 사상을 공유했던 인도 출신 철학자이며 명상가인 크리슈나무티(Jidu Krishnmutri 1895-1986)의 책도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내가 명상을 하도록 계기를 마련해 준 그의 저서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읽은 지 4년이 흘렀는데 그때 읽었을 때 굉장히 그의 사상들이 낯설었지만 신선했으며,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지금 읽고 있는 <시간도 없는 공간 속에서>에서 나오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생각들은 데이비드 봄의 것과 다르지 않다. 영성을 다루는 인도 철학자와 서양 과학자의 견해가 일치하다니 참으로 놀랍다.
 
봄은 <대화에 관하여>에서 '관찰자'를 '가정'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설명해주고 있다. 개인이 경험한 과거의 기억 학습등을 통해 얻은 모든 것들이 각자의 기준으로 '가정'이 되어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개인이 지닌 이 '가정'은 과거의 경험과 체험에서 느낀 기억들이 축적되어 있기에 현재 특정한 사물을 보고 경험을 하는 매 순간 이 '가정'이 관여하게 되고, 각자 자신이 가지는 '가정'을 통한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정'은 궁극적으로 '관찰자'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되는데, 얻은 정보가 눈과 귀를 통해 뇌에 전달되면 이 '관찰자'는 자신의 '가정'을 근거로, 정보에 대한 의미를 판단하고, 그 정보를 선택하거나 혹은 통합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가정'을 근거로 일정한 의미와 형상으로 정리하는 역할"을 ‘관찰자’가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이런 관찰자가 들어있는 것이다.
 

방 한쪽에 있는 의자를 관찰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 경우는 나의 내면이 관찰당하는 피관찰자 즉 의자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관찰자와 피관찰자가 다르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나 사고를 관찰할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다.  당신이 사회나 타인을 들여다볼 경우 당신의 가정은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 상대 즉 피관찰자 또한 관찰하는 당신을 인식하고 당신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고 반대로 상대의 감정적인 반응이 다시 관찰자인 당신의 가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데이비드 봄 <대화에 관하여>-

 


크리슈나무트는 <시간이 없는 공간 속에서> 관찰자와 피관찰자 사이의 분열로 인한 갈등의 원천이 바로 인간의 말로 인해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말이나 사물에 붙여진 이름들을 언어라는 도구를 매개로 우리 사고에 저장시켜 놓고, 언어로 저장된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 어떤 대상을 ‘관찰'하는 과정이 시작되면 저장되었던 사고가 움직이면서 이 관찰에 개입하는  "사고의 운동"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관찰당하는 대상을 축적된 언어로 판단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이 그르다. 이것은 이래야 하고 저래서는 안 된다." 이 순간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의식 안에서  머물러 있구나, 를 자각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데, 이렇게 사고가 흘러가고 있는지 인식조차 못하고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흘러가는 ‘사고의 운동' 즉 의식의 움직임을 스스로 관찰할 수 있는 '관찰자'가 될 수 있을 때,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작용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큼 우리 삶에 침투해 많은 여러 문제를 야기시키는지 그 심각성을 우리는 인식조차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문제의식을 느낀 데이비드 봄은 이런 '사고의 흐름'을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개인 간의 소통 방식부터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고'에 그 어떤 '가정'도 개입되지 않은 대화로부터의 출발이 인류 모두가 함께 잘 살 사는 길이라고 보았다.
 

사람들은 아무런 왜곡이나 동기가 없이 관찰하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그저 관찰만 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술 속에는 엄청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그 어떠한 비틀림도 없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를 깨끗하게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물들을 관념의 덩어리로 추상화한다면 그것은 이미 왜곡한 것이다. 어떠한 왜곡의 인자도 포함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롭게 의식의 관찰을 시작해야 한다. 아무것도 숨겨진 것이 없으면, 그때 의식은 자신의 총화, 곧 탐욕과 질투, 행복, 이념 과거의 전통, 현재의 과학적 믿음 등 우리의 의식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겉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시간이 없는 공간 속에서>-

 
이 두 사람이 말하는 지점에 도달하고 싶다. 쉴 새 없이 흘러가는 ‘사고‘에 대해 인식할 줄 아는 힘을 기르고,  더 이상 기계적으로 ‘사고’하면서 그 ‘사고’의 홍수에 떠다니거나 휩쓸려 다니지 않도록 말이다. ‘있는 그대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힘과, 내 안에 축척된 ’ 가정‘을 잣대로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 능력을 기르고 싶다. 영성을 다루고 있는 인도철학자와 서양과학자의 교류가 남긴 대화 내용과 그들이 지닌 사상들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실천해야 되는  유용하고 소중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