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언 머피 제작 주연으로 지금 상영되고 있는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은 아일랜드 출신 작가 클레어 키건(1968~)의 단편 소설이다. 그녀의 다른 소설인 <맡겨진 소녀>도 좋았지만 이 작품을 원작으로 제작된 "말없는 소녀"도 소설과 조금은 다른 시각이었다. 감독의 시각이 나쁘지 않았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책을 먼저 읽고 지난 주영화를 봤다. 전작과는 다르게 영화는 상당히 원작에 충실한 것이 느껴졌다. 전체적인 영화의 템포감이 빠르지 않아 지루할 수도 있었지만, 주인공 빌 펄롱을 연기한 킬리언의 명연기 덕분에 영화 보는 내내 집중하게 만들었다. 영화를 보고 다시 소설을 읽으니 처음 읽었을 때 놓치고 간 부분이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 장편 소설이 아님에도 이렇게 강한 메시지를 집약적으로 소설에서 보여준 클레어 키건의 재능과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일랜드 어느 시골 석탄을 팔며 가정을 꾸려나가는 다섯 딸을 둔 가장 빌 펄롱은 아내 아이린과 부자는 아니지만 평온하고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그는 부지런하고 바쁘게 살아가고 주위 이웃에 크지는 않지만 늘 선행을 베풀고 사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자신이 지냈던, 윌슨 부인의 집에서 하녀로 지낸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에게 베풀어준 윌슨 부인의 선행과 그 집 하인으로 있었던 네드 아저씨와 지냈던 시절을 떠올리며 상념에 빠진 곤 한다. 그 추억은 빌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녀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소녀를 수녀원 창고에서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윌슨 부인집에서 받은 사랑의 힘이 그에게 작동하기 시작한다. 수녀원 창고에 발견된 그 소녀가 다름 아닌 수녀원에서 학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빌은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 마을에 그 수녀원은 주민들의 삶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 펄롱은 갈등하기 시작한다. 현실의 삶에 타협하고 조용히 살 것인지 아니면 윌슨 부인처럼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자신과 그의 어머니가 도움을 받은 것처럼, 그 소녀를 외면하지 않고 싶어 한다. 그러나 수녀원이 자신과 가족에게 끼칠 영향력에 맞설 싸울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크리스마를 하루 앞둔 그는 어린 시절 윌슨 부인과 마찬가지로 아빠처럼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준 네드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자신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네드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 준 사랑을 떠올린다. 네드가 피를 나눈 아빠가 비록 아니었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아빠 이상의 사랑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기를 내어 수녀원 창고에 갇힌 소녀를 찾아가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빌 펄롱의 어머니와 그가 도와준 그 소녀의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우연으로만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다. 세상은 돌고 돈다. 빌은 자신이 받은 타인의 사랑이 얼마나 자신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천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가족을 꾸리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책임감 지닌 가장이 돼서야 깨닫는다. 그런 상황에서도 빌 자신이 어린 시절 받았던 사랑을 이웃에 나누어야 됨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까지, 소설 속 빌의 심리 묘사는 참으로 인간적이며 감동적이다. 끝까지 현실에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빌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 있고 현명한 결정을 내린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지금 같은 수녀원 같은 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을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빌 펄롱이나 그를 사랑해 준 윌슨 부인, 네드 같은 소수의 사람이 이 세상을 지탱해 주는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성경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단한 권력과 굉장한 종교적 영성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엄청난 기부를 하는 부자가 아니기에, 이처럼 사소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보석과 다름없는 가치를 지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척박한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이들에게 삶의 용기를 가지게 된다. 이 소설의 위대함은 여기서 있다.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되는 소명 의식과 실행력의 힘을 생각하게 해 준다. 내 이웃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야 됨을 깨우쳐 준다. 이웃집 딸이 불행할 때 내 딸도 불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좋은 문학이나 영화는 적어도 두 번 이상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것 같다. 결과를 알고 처음 다시 돌려 보게 되면 스토리의 개연성과 맥락, 원인과 결과의 이어짐이 처음부터 사슬처럼 얽혀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클레어 키건의 작품도 그러했다. 결과를 알고 다시 읽어 보니 처음 내용부터 버릴 것이 하나 없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가져다주었다.
올해 밀란 쿤데라가 쓴 소설들을 읽어서도 좋았지만 2024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으면서 인간의 소중함을 따뜻한 시선으로 전해준 그녀의 글에 가슴이 뭉클했다. 2024년에 읽은 최고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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