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소년이 온다 (feat. 선득한 빗방울... 소년의 눈물)

Christi-Luna 2025. 1. 20. 07:32

한강 작가의 위대함은 눈으로 글을 읽고 머리로 생각하게 만드는 동시에 몸으로 읽히고 더 나아가 섬세한 감각을 독자에게 전해준다는 점이다. 한강 작가가 자랑스럽다. <소년이 온다>를 통해 광주 사태를 드러내준 그녀의 도전과 용기가. 그리고 부럽다. 그녀의 섬세한 글이... 오감으로 느껴 몸으로 읽게 되는 그녀의 글들이... 스톡홀름 시상 연설에서의 침착함, 평온함... 엄청난 명성과 쏟아지는 관심에 대응하는 그녀의 이성적인 태도와 소박함, 행동들... 멋지다. 
 
처음에는 한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수상했다고 생각했는데, 노벨상 관계자들은 <소년이 온다>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을 읽어보니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뭐로 받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닐 테지만 말이다.
 
인간이라면,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인간들이 지은 죄로부터, 나 혼자 빠져나와 죄 없다 결백을 주장하며 자유롭기는 어렵다. 인간이 인간을 벌하고 용서하는 것은 어쩌면 모순이 아닐까.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세상을 향한 인간의 존엄이 어디까지 지켜질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참하게 짓밟혔을 때, 그것도 인간으로부터 그 잔인함이 나온 것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 세월호도 얼만전 비행기 사고도...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말이다. 법륜 스님의 말씀처럼 인간이 하지 말고 지켜야 할 계율이, 살아있는 생명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무안 공항 사고가 설사 조류 떼가 원인이었다고 하더라도 무안 공항 이전에 그곳에 머무르며 지냈던 새들이 그 공항을 인간에게 양보하고 떠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그것에  대한 대비책을 새들을 위해 염두에 두었을까. 공항을 만들어 사용하는 편리함에 우리는 환호했을 것이고, 공항을 짓기 위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세금도 쓰였을 것이다. 이 사고 안에 우리 모두의 이기심과 인간이 자연을 향한 폭력이 있었을 것이다. 드러나지 않아 모르고 지나쳐 버린 것이다. 하물며 나와 직접적이지 않아 보이는 것부터 죄에서 자유롭기 어려워, 의식하지 못한 채로, ‘업’을 짓는 판에, 광주 사태는 웬 말이냐 말이다. 작정하고 인간이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을 잔인하게 죽이고,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그 대가로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챙겼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내가, 어린 동호 입장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죽어가는 친구를 두고, 나 죽기 두려워, 도망갔을 것이다. 친구를 외면한 죄로 자책하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양심의 가책은 물리적 죽임을 받는 것 이상으로  큰 무게감을 가지고 남은 삶을 살아가게 만들 것이다. 서서히 죽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은주도, 선주도 진수도, 동호의 어머니도, 그들이 받은 고통과 상처는 늘 그림자로 따라다닐 것이다. 한강 작가의 글을 통해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희생된 소년의 죽음이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옅어지지 않고 드러나게 되어 다행이다.  
 
한강 작가가 쓴 이 비극의 잔상들과 비극의 희생자들의 혼은 세월이 가도 퇴색되지 않게 명료한 자국으로 그녀의 작품을 통해 남겨졌다.  '살인자 전두환'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잊히지 않도록 글 속에 새겨져 버렸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 속에 전 세상사람들에게 영원히 오픈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살인자들에게 내리는 신이 내린 무서운 벌이 아닐까. 살인자의 낙인은 지워지지도 잊히지도 않을 것이다. 광주 사태로 군사 정권에 이권을 받은 사람들은 <소년이 온다>를 보고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한강 작가는 동호(너)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동호는 더 그랬을 것이다. 한강 작가가 살던 광주 '중흥동 집'에 그녀가 살았었기에, 어쩌면 동호가 그녀와 같은 방을 썼을 것이라 여기고 이 작품을 쓴 것으로 여겨진다. 그녀의 언니가 두 달 만에 죽고 더 이상, 임신을 원하지 않았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녀는, 언니 삶을 대신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산다 했다. 이런 생각을 한 그녀라면 자신이 쓰던 방을 공유한 동호도 자신과 동일시 여겼을 것이다. 자신을 통해 동호를 다시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 작가 자신의 소명임을  확신했을 것이다. 한강 작가는 자신의 글을 통해서 동호의 "혼"을 불어넣은 것이다. 
 

장례식장과 응급실로, 병동과 병원 정문으로 갈라지는 도로를 밝히던 외등들이 일제히 꺼진다.
도로 가운데 그어진 흰색의 직선을 따라 당신은 얼굴을 들고 걷는다. 선득한 빗방울이 당신의 정수리에, 당신의 운동화가 내딛는 아스팔트에 떨어져 번진다.
 

죽지 마.
죽지 말아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동시성'과 '우연의 일치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시간과 공간이 없는 이 우주에 한강 작가가 살던 중흥동 집에 이사 온 어린 동호를 두고 말이다. 작가가 살던 집에 살았던, 한 소년의 비극적 죽음을 알리기 위해 쓴 소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닐 것이다. <소년이 온다>는 시 공간의 벽을 허물었다. 동호는 한강 작가의 혼에 들어가 그녀로 하여금 책을 쓰게 하고 이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염원했을 것이다. 동호가 희생당한, 1980년 광주 사태와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은  '동시성'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을 함부로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비명조차 질러보지 못하고 고통받으며 죽어간 영혼들이여 편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