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을 읽고 있는 중이다. 스물다섯 살에 이 소설을 토마스 만이 쓰다니 대단하다 싶다. 젊은 나이에 어떻게 삶에 대한 통찰력을 이렇게 깊이 가질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아직 2권 초반부를 읽고 있는 중이지만 오늘 새벽에 읽은 구절이 마음에 와닿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가문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바치고 살아가는 주인공 토마스 영사는 조금씩 집안의 몰락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여동생 안토니에게 말한다.
"그때 넌 나한테 이렇게 말했지. '이제 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어야 할 것 같아! 그 말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 그때는 네 말이 옳은 것 같았어. 시의원 선거가 있었기 때문이지. 난 행운을 잡았어. 여기에서 집이 솟아올랐지. 하지만 '시의원'과 집은 피상적인 것일 뿐이야. 그리고 난 네가 여태껏 생각지 못한 무언가를 알고 있어. 삶과 역사에서 알게 된 거지. 종종 행복이며 번성이라는 피상적이고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징조와 상징은 사실 만사가 이미 하강 국면에 들어설 때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어. 이러한 외적인 징조가 내부에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거야. 저 하늘의 별이 가장 밝게 빛날 때는 그게 벌써 꺼지기 시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꺼진 것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토마스는 시의원으로 임명된 뒤 자신의 직위에 걸맞다고 생각하는 집을 무리하게 짓고 난 뒤, 더 이상 세상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토마스는 부덴브로크가 가문의 명예와 다른 사람의 안목을 중요시하기에 가족들의 생활 방식과 태도가 외부에 거슬리지 않도록 지나치게 신경 쓰고 가문의 지위에 걸맞게 그것들이 맞춰지기를 원했다. 말이 좋아 명예심이지 집착인 것이다.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스스로 구속하고 얽매인 것이다. 그것이 왜 그런지 생각할 틈도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토마스의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다.
몸이 주인에게 속해 있기에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노예다. 그런데 자신의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켜내야 할 것이 많다면 가문이라는 주인에게 메일 수밖에 없는 노예나 마찬가지다. 가문의 명예를 지켜내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니까. 물질의 풍요가 주어졌을 뿐 토마스의
삶은 노예의 삶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이 가지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 고전분투하고 세상이 인정해 주는 행복을 가지기 위해서 뭔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며 말이다. 이것이 토마스만의 얘기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의 애기 일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어른이 된다는 의미는 세상 속 노예로 살다가 몰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 말이다.
마냥 행복한 이 어린 시절에는 순수하고, 강력하고, 열렬하고, 때묻지 않고, 또 위축됨이 없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있다. 그 시절에는 아직 인생으로부터 시련을 겪지 않는다. 의무도 책임도 감히 우리한테 손을 벌리지 않는다. 우리는 보고, 듣고, 웃고, 놀라고 꿈꿀 수 있다. 세상은 아직 우리한테 손톱만치도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참을성을 견지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을 유능하게 해서 능력을 처음으로 드러내 보이려고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아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시절이 계속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름으로써 우리를 억압하고 훈련시키고 늘이고 울리고 하다가 망치게 된다.
부덴부르크 가문을 지키려는 토마스의 삶은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일까. 어떤 삶의 기준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아직 작품을 다 읽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그의 후반부 삶이 예상되기도 한다. 자신이 어떤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정답은 없을 것이다, 어떤 것이 좋은 삶인지. 그런데 세상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자신의 삶이 한쪽으로 치우쳐 살아가고 있는지 인식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말이다. 이 중도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경계해야 할 것은 과도한 집착이라 생각한다. 부덴브로크 가문의 명예를 자신과 동일시 한 토마스는 그것에 집착하여 가족의 유대감도 끊어버린다. 사람보다 권위를 지키고 명예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 그의 과오인 것이다. 생각보다 우리에게 명예욕이 누구에게나 있다. 좋은 자식이 되기 위해,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결국 이런 위치를 잘 지켜야 된다는 혹은 잘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 또한 명예욕이 강한 집착의 한 형태이다.
삶의 주도권을 외부로부터 과도하게 뺏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보이는 외부환경이 늘 관대하게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 반대인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중도적인 삶을 유지하며 균형감을 잃지 않도록 살아가야 하는 것이 답일 수 있다. 방심이라는 것이 용납 안 될 수 있다. 긴장 자세의 연속임을 받아들여만 한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히는 늘 깨어있으라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말일 것이다.
또 하고자 하는 일이 잘 된다고 스스로 특별한 사람인 것 마냥 으쓱해하고 이것이 변함없을 거라고 착각하며 살면 안 된다. 토마스가 말한 것처럼 하늘의 별이 가장 밝게 빛날 때는 그게 벌써 꺼지기 시작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함몰되어 자기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이야 말로 불행일 것이다. 잘 사는 것, 잘 살아내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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