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록

독서를 하면서 드는 생각들

Christi-Moon 2023. 5. 9. 15:57

2017년쯤부터 시작해 오던 독서지만 초반에는 읽는데 급급해서 기록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독서량만을 따지면 적은 분량은 아닐 듯한데 그때마다 기록을 해놓지 않아 읽었던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심지어는 내가 읽은 지도 모르고 그 책을 검색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요즘은 기록을 하려고 하는데 읽고 싶은 게 많아, 읽는 속도가 느려지니 그것 또한 속상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욕심, 집착, 내려놓아야 한다.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얼마간은 기록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삶이 달라졌다.  만약에 책이 없었다면  삶을 지금처럼 긍정적이고 반성하고 때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현재의 삶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살면서 실제로 많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 책을 읽는 것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가끔 경험했던 것들 중에 무의식이든, 의식이든 내 안에 잠재워져 있던 것들이 독서를 통해 명확하게 이해되고 정리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래서 경험했던 것들 조차도 내 것으로 완전히 소화되려면 독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험한 것들도 무엇을 경험했는지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삶의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독서가 아니라면 주어지기 어렵다. 지난 삶의 실수를 반복하거나 늘 하던 대로 생각하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삶을 개선하고 변화시키고 싶은 의지가 생길 때가 있다. 그것이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독서를 통해서도 좋은 동기부여가 된다. 독서의 시작이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 그 자체이기 때문에 지속성만 따라준다면 이제껏 삶의 축적된 경험이 독서와 합쳐져 삶의 변화는 급속도로 일어날 것이다. 책으로부터 얻은 것들이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진다면 말이다.

*비엔나 어느 서점 앞에서


내게 독서는 이제껏 살면서 경험했던 것들을 반성하게 해 주고 위로도  되어주는 친구이자 멘토가 되었다. 사실 독서를 하면서부터 사람 만나는 것이 예전처럼 즐겁지 않다. 물론  이런 현상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독서와 인간관계를 하는 것은 다르겠지만, 인간과의 관계는 감정 낭비가 더 심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아마 내가 예민하고 내향적인 성격이라서 더 그렇겠지만 말이다. 물론 지나가는 개도 내 스승이 될 수 있지만 다양한 사람과의 접촉이 에너지를 소진시킬 때가 많다. 그런데 독서를 통해 만나는 작가들은 그런 에너지 소모보다는 에너지를 충전시킨다. 그들의 다양한 생각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가치관들이 내 삶의 방향성을 잡아주고 정리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인간들과의 만남은  삶의 방향성을 흔들어 놓을 때가 더 많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나의 판단과 구별이 잘못된 독서의 방향성일 수 있으니 경계는 해야 한다. 그러나 만남의 의미가 실제로 그 사람을  눈으로 보고 접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독서를 통해서 알았다. 생턱쥐베리,  세르반테스, 니코스카잔챠키스, 도스토예프스키, 안톤체호프, 토마스만... 이들이 눈앞에 없지만 책을 읽을 때 이들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말하면 오버일 수 있겠지만 독서를 통해서 플라토닉 사랑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드라마에서 멋진 주인공들이 마치 살아서 실제 하는 것처럼  설레는 감정을 느낀다. 물론 주인공들과 배우들의 외모까지 겹쳐져 시각적 욕구가 충족이 되어 그렇겠지만, 저자들과의 교감은 그야말로 플라토닉 한 사랑이다.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의 영혼을 가지고 싶은 그런 갈망이 생긴다.
 
내 생각이지만 독서를 한다는 것은 사실 문학을 읽는 것과 제일 통한다고 말하고 싶다. 자기 계발서나 정보와 기술 지식을 습득하는 책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할지 삶의 태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삶의 태도를 결정하기 전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 이 현명한 눈을 가지기 위해서 선행되는 독서는 문학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 속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있다. 위대한 저자들의 문학 속 인물들은 그야말로 흑과 백으로 나누기 어려운 인물들이 많다. 한 인물이 때로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가 하면 내가 현실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친구나 지인 가족들을, 문학 속 인물을 통해서 찾을 수 있고, 그들을 이해하는 기회까지 제공해주기도 한다. 때로는 내가 알지 못했던 나를 드러내서 밝혀주기도 한다.  문학은 그런 힘이 있다. 과학기술의 진보가 하루기 다르게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인간 삶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문학을 통해서 가장 힘을 발휘할 것이다. 세상은 이분법으로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게 하고, 그것이 ‘선’인 것처럼  강요하고 있으나 우리는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삶의 본질은 이분법으로 통하지 않는다.  거기서 주는 괴리감으로 삶을 살아가게 되면 절망과 좌절이 생긴다.  우리가 그럴 때 종교를 찾는다. 삶이 힘들 때 종교를 통해서 위로와 힘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독서를 통해서 가능했다. 참 이상한 것은 문학을 읽으면 읽을수록  특히 유럽 문학은 크리스천 사상이 바탕이 되어 있지만 그 기저에는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것들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불교 책을 몇 권 읽어 주제넘게 말하는 것일 수 있지만 토마스만이나 도스토예프스키나 생턱쥐베리나 헤르만헤세나 모두 불교에서 말하는 것들과 맞닿아 있다. 이 작가들이 동양사상에 대해서 알고 책을 썼겠지만 결국 불교와 기독교의 성인들이 말하는 이야기들의 본질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다.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아침마다 한 챕터씩 읽고 있다.  P142  "불 보살은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이 구절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의 소냐를 생각나게 했다.  작품 속 창녀인 소냐는 살인을 한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구원의 길을 가도록 도와준다. 소냐는 여기서 말하는 불보살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망태길를 뒤집자 죽은 개가 푸른 사자로 변하더니, 거지는 그 사자를 타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늙은 거지가 바로 문수보살이었던 것입니다. 자장율사가 뒤늦게 뛰어나왔지만 문수보살은 이미 동쪽 하늘로 날아가 버린 뒤였습니다...불보살은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소리 없이 내려와 언제나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불보살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불보살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상에 빠져 하나만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벌>의 창녀 소냐는 불보살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소냐를 창녀로서 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라스콜니코프는 소냐를 창녀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구원의 길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토마스 만의 <부덴부르크가 의 사람들>에서 읽히는 것들이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설하는 법과 맥락이 같은 것임을 알게 됐다. 결론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종교와 철학을 이해하게 되는 발아점인 것 같다. 사실 종교와 철학서를 먼저 읽는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문학을 읽게 되면 작가의 철학이 곧 종교랑 통해있으며, 그것들이 모두 세상 살아가는 본질임을 깨닫게 된다.


너무 두서없이 글을 쓴 것 같은데, 아무튼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도 책 읽기를 통해서이다. 이런 길을 가게 된 것은 위대한 저자들 덕택이다. 5월은 감사의 달이니까, 내 삶의 멘토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보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