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죽음에 대한 통찰 (feat. 토마스 만)

Christi-Moon 2023. 5. 12. 21:09

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그렇지만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을 토마스 만이 <마의 산>보다 젊었었을 때 써서 그런지 모르지만 죽음에 대해서 더 진지한 묘사로 접근한다. 반면에  작가가 나이 들어 쓴 <마의 산>에서는 죽음에 관해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현세의 삶에는 잠시 적응하는 듯해 보였지만 폐렴과는... 오랫동안 끈질기게 투쟁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이겼는지 졌는지는 제대로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지금은 엄숙하고 평화로운 표정으로 관대 위에 누워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제 임시로 적응하던 현세에서 엄숙하게 벗어나 자신에 걸맞은 본연의 모습으로 최종적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할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죽음이 실제의 몸 대신에 끼워 놓은 실물 크기의 밀랍 인형으로 생각된 것은 죽음이 지닌 이러한 속성과 관계가 있었다... 홀에 누워 있는 사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홀에 누워 있는 물체는 그러므로 할아버지 자신이 아니라 하나의 껍질이었다... 그 어떤 특수한 물질. 오직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거의 아무런 슬픔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육체와 관련된 사물이 슬픔을 자아내지 않듯 이것도 슬픔을 자아내지 않았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에서 가문 몰락과 인물들의 죽음은 어떤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까?  토마스 이전의 세대들은 죽음의 대한 통찰을 할 겨를도 없이  다소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토마스는 심지어 처참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한다.

 

거리가 급경사의 내리막길이어서 그의 상체가 발보다 훨씬 낮은 곳에 위치했다. 얼굴이 땅에 부딪히는 바람에 사방에 피가 낭자했다. 그의 모자는 차도 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의 털외투는 진흙과 눈 녹은 물이 뒤섞여 엉망진창이었다. 윤이나는 힌 장갑을 낀 그의 손은 쫙 펴진 채 웅덩이 속에 들어가 있었다. 거리를 지니던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서 그를 일으킬 때까지 그 상태로 누워있었다... 토마스 부덴브로크가 옷을 다 벗고 수놓은 잠옷만을 입은 채 널따란 마호가니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반쯤 뜬 그의 두 눈은 초점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콧수염 아래의 입술은 잘 돌지 않는 혀로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달싹거리고 있었다. 

 
토마스 부덴브로크의 죽음과 관련된 스스로 가진 통찰은, 몰락 그 너머의 것을 말해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몰락은 없다.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 몰락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은 늘 반복하면서 변화하고 순환한다. 브루덴브루크 가문은 절정에서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하는 모양새다. 뭔가 끝이 날 것처럼 그 기운의 진통은 크다. 그런데 토마스의 처참한 죽음은 부덴브로크가의 새로운 무엇가의 시작 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토마스의 아들 하노이의 죽음은  티푸스 병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있을 뿐 윗 세대의 죽음과는 조금은 다르다. 그의 죽음에는 희망이 있다. 하노이가 죽기 직전 어린 카이 백작과 하노이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별한다.
 

하노이의 마지막 병에 대해서는 말 못 할 비밀이 감도는 것 같았다... 마지막 일화를 기억 속으로 불러일으켰다. 다 해진 옷을 입은 어린 백작이 찾아왔다. 그는 사람들을 마구 헤치며 병실로 달려들었다. 하노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라보더니 미소를 짓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카이는 그의 두 손에 한없이 입맞춤을 해 댔다. "손에 입맞춤을 했다고?" 부덴브로크 여인들이 물었다. "그래 여러 번" 모두들 한동안 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하노이는 이렇게 카이가 있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는 죽어가는 과정이 비참했지만 죽은 후 장례식은 화려했다. 자신의 지위에 걸맞게 화환이 쇄도했다. 그 화환 때문에 주변 꽃가게들이 수입을 많이 올렸는데 그중에서 토마스가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여인의 꽃가게가 토마스 장례식의 꽃 주문으로 돈을 크게 벌었다. 토마스 안에 꽃집 아가씨에 대한 사랑의 믿음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죽은 후에도 그 사랑의 에너지가 이어진 것이다. 아마도 꽃가게 여인의 자식이 토마스의 자식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토마스가 읽은 쇼펜하우어의 <죽음과 우리의 존재 자체의 불멸성과 그것의 관계에 대하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이던가?... 죽음이란 축복이었다... 안타까운 불행한 사건을 원상 복구하는 것이었다. 종말이자 해체라고?  이러한 하찮은  개념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은 측은하기 짝이 없다! 무엇이 끝나고 해체된단 말인가? 이 육신... 인격, 개성... 증오할 만한 장애물은 다른 더 나은 그 무엇이 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내 아들 속에서 계속 살아가기를 나는 희망했는가?... 아들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나에게는 아들이 필요 없다! 내가 죽는다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여태껏 나라고 말했고 말하고 있고 말할 그 모든 사람들 속에서 난 존재할 것이다... 죽음이 가엾은 망상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주는 순간 나 자신도 아니고 그도 아닌 것이다.


설사 꽃가게 여인의 아이가 토마스의 핏줄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여인의 아들과, 하노이와 친밀한 교류를 가진 카이를 통해서도 부덴부르크 가문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자손만이 그 가문을 이을 수 있다는 것은 망상이라는 것이다.

나 자신이라는 협소한 감옥에 갇혀 있음으로 해서... 나는 얼마 안 있어 그런 상태가 끝날 것이다... 역사적으로 해체되고 분해될 것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은 그가 항구적인 영원을 이해하는 것을 더 이상 방해하지 못했다... 시작도 끝도 없었다. 다만 무한한 현재만 있을 뿐이었다... 난 살 것이다...

 
브덴브로크가의 몰락은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토마스 만은 말하고 있다. 가문의 몰락은 하나의 ‘표상’ 일뿐, 사람들 속에 ‘나’라는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지 사람들 속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가 멀리 외국으로 가 만나지 못하고 연락도 못 한다면 그 친구는 살아 있는 것인가? 죽어 있는 것인가? 물론 그 친구는 살아있다.  만나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영원히 보지 못한다의 의미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그 친구가 내 눈앞에 보이지 않고 숨 쉬지 않기 때문에  죽은 거나 다를 바 없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어서 힘든 까닭은 이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 가서 못 만나는 거나 죽어서 못 만나는 거나 차이가 있는가? 토마스만은 차이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가문의 몰락이라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몰락과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시작일 뿐이라는 게 토마스 만의 소설이 주는 핵심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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