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야만인을 기다리며

Christi-Moon 2023. 5. 22. 19:53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역사에 반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만 있을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수 있는가 하는 생각.

      -J. M.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 중에서-

약한 민족과 국가를 지배하기 위한 제국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방식을 달리할 뿐, 아직도 존재하며, 이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 이 구조가 이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동물 간의 약육강식 형태처럼, 인간 사회도 그런 힘의 질서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받아들여야만 하고 그것이 제국주의라면, 지성인과 야만인은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을까?

어쩌면 국가와 민족의 차원을 넘어 기득권의 힘의 유지를 위해 희생당하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에 대해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보이지 않는 힘의 지배를 받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잘살기에 급급해하며, 세상의 안 보이는 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 힘에 대한 정당성을 판단할 여유조차 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합리한 힘의 구조를 알고서도 때로는 타협하며 살아가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것들을 저항 없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인가. 그럴 수도 없다. 깨어있는 소수의 한 개인의 인식이 하찮다고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던 이유가 이것일 수 있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는 것이 장한 것이냐 아니면 원한의 조수를 두 손으로 막아 근절시키는 것이 장한 것이냐? 죽는다. 잠잔다… 다만 그것 뿐이다. 잠들면 모두 끝난다. 번뇌며 육체가 받는 온갖 고통이며, 그렇다면 죽음, 잠 이것이야 말로 열렬히 희구할 생의 극치 아니겠는가! 잔다. 그럼 꿈도 꾸겠지. 아, 이게 문제다. 대체 생의 굴레를 벗어나 영원한 잠을 잘 때, 어떤 꿈을 꾸게 될 것인지, 이를 생각하니 망설여 질 수 밖에… 글쎄 이 주저가 있기에 인생은 일평생 불행하기 마련이지. 그렇지만 않다면 세상의 비난과 조소를 누가 참을 쏘냐? 폭군의 횡포와 세도가의 모욕을, 불실한 사랑의 고통과 무성의한 재판을, 관리들을 오만을 유덕할 사람이 받아야할 소인배의 불손을, 대관절 누가 참을 쏘냐? 한 자루의 단도면 깨끗이 청산할 수 있을 것을. 그 누가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지루한 인생에 신음하며 진땀을 뺄 쏘냐? 사후의 불안과, 나그네 한 번 가면 영영 못돌아오는 미지의 세계가 결심을 망설이게 하고, 생생한 혈색을 가진 우리의 결심 위엔 사색의 창백한 병색이 그늘져, 의기 충전하던 큰 뜻도 마침내 발길이 어긋나 실행력을 잃고 말거든.


이 책의 주인공인 제국 소속 '치안판사'는 제국이 저지르는 잘못에 대해 저항하여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대단한 영웅은 아니다. 어쩌면 햄릿형 일 수 있다. 그러나 정의와 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려 노력하고, 또 자신의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지켜나가야 할 최소한의 양심을 버리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야만인'에 대한 개념 정리를 다시 해봤다. '야만인'은 문명이 전해지지 않는 특정한 집단만을 일컬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인간성을 저버린 이익을 위한 개개인의 행위, 혹은 자국의 물질적 이익만을 생각하는 특정 힘센 국가등, 세상의 정의와 진실을 왜곡하고, 최소한의 양심도 저버린 개인과 집단을 통틀어 '야만인'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보듯이 '야만인'은 기다려 봤자 오지 않는다. ‘야만인’이라는 특정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마음속 추한 집착과 욕망이 보태져 ‘야만성'으로 드러나 폭력의 형태로 발휘되는 것이다.

나도 ’ 치안판사’처럼 ‘야만성‘을 경계하며 햄릿의 고민을 하며 살 거 같다. 그 고민마저 저버린다면 ‘인간’이 아닌 ’야만인‘이 내안에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