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인생이 그림 같다.

Christi-Moon 2023. 5. 27. 14:59

몇 년 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고 유럽 여행을 하면서, 서양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양화의 놀라운 섬세함과 뛰어남 색감에 반했었다. 어떻게 그렇게 디테일할 수 있는지, 사진보다 더 세밀한 작품에 넋이 나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 내게 대학때 서양화를 전공한 친한 친구가 해준말이 있다.

”한국화도 정말 좋단다. 친구야. 수묵으로 단순하게 그렸지만 그 안에 많은 것이 담겨 있어. 오히려 드러내서 시각화하는 것보다 더 깊은 것을 담아낼 수 있지.

그 당시 무식하고 교만했던 나는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려 버려었다. 그런데 그때 친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조금은 알 거 같다. 한국화는 섬세함을 묘사한 서양화 보다 단순하게 보이지만 그 여백의 미에서 주는 깊이는 언어로 설명되기보다는 느껴지고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전해준다. 15세기 조선초 문인 화가였던 강희안의 수묵화 <고사관수도>가 그러하다.

*강희안 고사관수도


사내는 산골 물을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시간은 멈추고, 넝쿨은 움직이고, 물결은 보채지 않는다...(중략)... 스산하되 외롭지 않고, 고요하되 무료하지 않은 경지이다."

    손철주 <인생이 그림 같다>중에서-

물 흐르는 산속에 바위에 기대어 계곡 물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모습은 뭔가 수심이 차 보이기 보다는 무심하게 바위에 기대어 산수(山水)를 즐기고 있는, 요즘 말로 힐링하고 있는 중이다.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검정 수묵 하나로 장엄한 깊은 산속의 분위기를 시각화시키고 계곡의 물소리가 마치 들려오는 착각마저 일으킨다. 동시에 정적인 선비와 이런 자연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호흡을 내려놓고, 흐르는 물소리 들으며 하염없이 물을 바라보는 그림 속 사내가 나'였음 하고 '나'이고 싶다. 그리고 ‘나’인 것 같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따스해지고 살며시 웃음 짓게 된다.

사유하고 위로해 주는 강력한 힘을 지닌 <고사관수도>는 걸작 중에 걸작이다. 시원함이 느껴지지만 내적인 따뜻함이, 여백이 많지만 꽉 차있는 듯한 느낌에서 오는 역동성이, 그렇다고 고압적이지 않는 자연의 기운은 애씀 없이 우리를 보듬어 주고 있다. 다양한 색들의 향연이 없어도 함축되어 있고 단순한 공간이 보이지만 놀라운 섬세함은 ‘벨라스케스’ 부럽지 않다. 친구가 내게 해준 말은 백번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