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파우스트 박사 8 (feat. 자유의 의미&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Christi-Moon 2023. 6. 20. 08:14

오늘 새벽에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22장을 읽다가 문득 내가 좋아하는 이탈리아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가 연출하고, 영국 배우 팀로스가 주연을 맡은 <피아니스트의 전설, The Legend of 1900>이 떠올랐다. 파우스트 박사 2장의 아드리안이 추구하는 음악의 세계와 영화 속 주인공 나인틴 헌드레드가 선택한 삶과 맥락이 비슷하다고 여겨졌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22장에 아드리안은 자유과 구속이 한쌍이라는 것을 피력한다.
 

맞는 말이야. 멋 모르고 자유에 대한 기대에 들떠 있을 때는 얼마 동안은 자유가 기대를 충족해 주지 하지만 주관성이 문제 될 때 자유란 다른 말이 되지. 주관성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할 때가 있으니까. 주관성은 언제 가는 스스로의 힘으로 창조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회의하게 되고, 객관적인 것에서 보호와 안전을 찾게 되거든... 자유는 구속을 통해 오히려 자신을 인식하고, 법칙화 규칙, 강제와 체계에 종속됨으로써 충족되지, 충족된다고 해서 자유의 상태가 종료된 다는 뜻은 아니다. 

 
1900년이 시작하는 날 이탈리아에서 미국 뉴욕으로 가는 이민자를 실어 나르는 배, 버지니아호 안에 버려진 남자아기는 배 안의 석탄실의 흑인 노동자 데니에 의해 나인틴 헌드레드라는 이름으로 길러진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버지니아호의 승객들을 위해 피아노 연주를 하고, 그 배가 폭파되어 사라질 때까지  배 안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폭파되어 사라질 배와 함께 삶을 끝내려고 한다. 이 배가 폭파되기 직전,  배 안에서 알게 된 친구이며 색소폰 연주자인 맥스는 나인틴 헌드레드를 구하기 위해 버지나 아호 안으로 가,  배 밖으로 나가자고 나인틴 헌드레드를 설득하지만 그는 거부한다.



 
나인틴 헌드레드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고민은 배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사랑을 찾아 그 배를 떠나야 될지 말아야 될지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의 천부적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뉴욕에서 펼칠 수 있을 거라는 사람들의 응원과 이별 속에서 배 밖으로 나가 육지로 내려가려는 순간,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던져 버리고 배안으로 들어오는 선택을 한다. 배에 내리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바다는 어머니이고 배는 자신이 펼쳐나갈 자신만의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더욱더 깊어진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뉴욕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배 안이란 한정된 공간에 스스로를 구속하고 자신의 음악 세계를 맘껏 펼쳐나가는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반면에 유럽에서 새로운 자유와 꿈을 얻기 위해  버지니아호를 타고 미국 뉴욕으로 가는 이민자들이 뉴욕에 도착해 "아메리카"라고 외치며 흥분해한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미국 뉴욕으로 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나라에서 가진 구속에서 자유로워졌지만 뉴욕에서 새로운 자유를 얻는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구속을 얻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로 환호성을 지른다. 
 

피아노를 봐. 건반은 시작과 끝이 있지. 어느 피아노나 건반은 88개야. 그건 무섭지가 않아. 무서운 건 세상이야. 건반들로 만드는 음악은 무한하지. 그건 견딜만해. 좋아한다고. 하지만 막 배에서 내리려고 했을 때 수백만 개의 건반이 보였어. 너무 많아서 절대로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것 같은 수백만 개의 건반. 그걸로 연주를 할 수가 없어

 
왠지 배안에서 지낸다고 하면 한정된 공간이고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고 인식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의 재즈의 창시자이며 최고 재즈 피아니스트인  젤리 롤 모튼이 버지니아호의 천재 음악가에게 연주 베팅을 신청하러 배 안에 오른다. 연주가 끝난 뒤 나인틴헌드레는 자신의 피아노에서 붙인 담배를 자신은 못 피니 젤리에게 피우라고 입에 물려준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참 멋있었다. 입에 문 담배에 담배 재가 흘러 미국 최고의 명성을 지닌 재즈 연주자의 발에 떨어진다. 그가 지닌 부와 명성은 한 줌의 재 일 뿐이라는 것을 상징해 준다. 뭔가 통쾌하고 위로가 되는 장면이다. 
 
자유를 선택하는 동시에 구속도 함께 얻는다는 것을 파우스트 박사 22장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자유 안에서 새로운 규칙과 규율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자유롭냐고 물으면 나는 자신 있게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도 일을 하고 있지만 예전보다는 자유롭게 일을 하고 있다. 반면에 일을 하지 않고 자유로롭다고 느끼는 시간에 SNS에 매여 있고 넷플릭스를 보고 있다면 나는 또 다른 구속을 가지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 구속을 넘어 그것에 노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다행히 그 부분에 강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 그 구속보다는 티스토리 글쓰기 매일 2시간 걷기,  영어공부 하기, 책 읽기, 요가하기, 명상하기.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구속이다. 매일 하지 않으면  찝찝하니까 말이다.  자신의 삶의 공간을 정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며 의지의 발로이다. 어느 누구도 그 공간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좋고 나쁜 공간도 어쩌면 우리 인식에서 생겨난 것일 뿐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영화 속 배라는 공간과 피아노 88개의 건반은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자유로운 의지로 스스로 선택한 구속된 공간이지만 동시에 무한한 자유와 자신만의 삶을 자유로이 창조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제한적으로 만드는 죽음의 유한함에서 인간은 마냥 자유로울 수 없다. 배가 낡고 쓸모가 없게 되어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나인틴 헌드레드는 배와  함께 폭파되고 사라지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면 그것이 진정 끝일까. 어쩌면 유한한 삶을 끝내고 맞이하는 죽음이야 말로 진정한 해방과 자유의 근원이 될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