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파우스트 박사 읽기를 마쳤다. 26장 이후로 다시 읽어봐야겠지만 다 읽고 마친 후에 느낌은, 아드리안의 예술 여정에 함께 긴장하며 숨 죽이며 읽어 내려간 거 같다. 글을 쓰기에 여러 가지로 머리에 떠올라 정리가 안되지만, 한 단어로 정리해 보자면 '욕망'이다. 우리가 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이 욕망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34장을 작가는 특이하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아드리 안의 광기, 국가의 광기 그리고 이 둘이 합쳐져 한 인간과 국가의 욕망이라는 연관성을 가지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이 욕망의 정점을 이 장에서 보여준다. 이 욕망은 창작의 힘이며 새로운 변화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 과정은 지옥이나 다를 바 없다. 아드리안의 창작 과정은 그 지옥을 경험한 것이다.
예술가에게 침체 상태와 창조적 고양 상태, 병과 건강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맞는 말이다... 천재라는 것은 병적인 상태와 친숙하고 병을 통해 창조력을 발휘하는 생명력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요한 계시록⎦을 소재로 한 오라토리오가 구상, 이 은밀한 작업은 아드리안이 완전히 탈진한 듯한 시기에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당시의 비참한 상태가 어쩌면 일정의 도피처나 은신처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주위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성가신 일을 당하지 않고, 철저히 차단된 상태에서, 보통 사람의 건강한 생활과는 고통스럽게 분리되고 은폐된 채 남몰래 계획을 구상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본능적으로 그런 고립무원의 상태를 자청했을 것이다. 보통의 편안한 상태에서는 감히 그런 계획을 시도할 모험적인 용기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구상은 마치 저승에서 훔쳐 와 세상에 내놓은 것 같았다.
창작은 편한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프랑스 작가 생턱쥐베리도 비행기술이 고도록 발달하기 전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비행의 위험을 알고 있지만 비행기 조종사와 글을 쓰는 것을 병행하였다. 그의 걸작 <어린 왕자>도 그가 탄 비행기가 사막에 행방불명된 후 한 달 만에 구조되고 그 후에 쓴 글이 어린 왕자이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결핵에 걸렸음에도 죄수와 사형수들이 사는 사하로프로 가서 그곳의 생활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글을 발표했고, 거기서 돌아온 후 그의 유명한 4대 장막극이 탄생한다. 또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사형수로 유배를 떠나 사형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통해 그의 불후한 명작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이들은 지옥에서 창작을 할 수 있었으며 곧 그들이 겪은 지옥은 그들의 위대한 창작품을 통해 영원불멸이라는 신적인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드리안도 그러하다.
나는 공포와 경악, 초조감과 자부심을 갖고서 그 작품의 탄생 현장을 지켜보던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도 마음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이 엄격한 규칙을 따르면서도 복잡한 기교와 정신을 담아 완성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평범한 시민답게 중용을 지키는 규칙적인 작업 속도에 익숙해 있던 나는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매일 열 시간씩 작업했는데 그 작업은 짧은 점심시간과 이따금 연못 주변이나 시온 동산으로 산책을 가는 동안에만 중단되었을 뿐이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작곡이라는 게 대체 뭐 하는 것인지 깡그리 잊어버릴 정도로 혹독한 고통이었다.
특이하게 34장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간 34장의 "계속"이라고 이어지는 중간 부분은 독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식스투스 크리트비스 집에서 있었던 지식인들의 토론과 관련된 이야기로 이 모임에는 다니엘 추어라는 시인이 등장한다. 왠지 히틀러를 연상시킨다. 마치 성직자 같은 복장을 하고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검은 양복을 입은 그는 정신 사납게 말을 하는데, 아드리안의 욕망이 창작의 고통을 낳았다면 시인인 다니어엘 추어가 지은 시 ⎡포고⎦를 통해 히틀러의 욕망을 알 수 있다.
그의 시적 몽상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순수 정신을 추구하고, 공포와 규율을 수반하는 순수 정신으로 다스려지는 세계를 지향했다. 그의 유일한 작품인 ⎡포고⎦라는 시에서... 포고령을 내리는 시적 화자는 '최고 황제 그리스도'라는 가상의 인물이었다. 명령권을 쥐고 있는 이 막강한 인물은 필사의 각오가 되어 있는 군대에게 지구를 정복할 것을 호소했는데... 빈곤과 금욕을 감수하라고 외쳤는데 발을 동동 구르고 주먹으로 탁자를 탕탕 치면서 무제한의 절대 복정을 요구하고도 직성이 풀리지 않는 어조였다. 그 시는 이렇게 끝맺고 있었다. "병사들이여! 제군들에게 약탈할 권한을 부여하노라. 온 세상을 약탈할 권한을!"
이 장의 핵심은 지식인들의 태도이다. 히틀러로 연상되는 다니엘 추어의 생각에 경계심을 가지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상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자세는 읽으면서 역겨웠다. 히틀러의 욕망이 인류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폭력과 파괴력을 지니고 있음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에도 이를 방관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이 바로 악마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정리하고 싶어 여기까지 오늘 쓰고 <파우스트 박사> 14로 이어, 이 챕터에서 회자 된 소렐의 “폭력론”과, 모임에 참석한 지식인들이 연 ‘모의 법정’에 대한 내용을 이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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