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록

영화 <그녀에게> (feat. 인연과 인과의 삶)

Christi-Moon 2024. 1. 1. 07:51

스페인 출신의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작품 <그녀에게>는 독특한 사랑 영화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본 시기가 <라라랜드>를 영화관에서 관람하고 얼마 안 돼서 <그녀에게 (Talk to Her)>를 보게 됐다. 두 영화 모두 사랑 이야기이지만 접근방식이 다르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와 유럽 영화의 차이 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라라랜드>는 여주인공이 자신의 일에 집중하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이별하고, 성공하고 난 후 헤어졌던 연인과 재회한다. 사랑의 추억을 서로  마음 속에 간직한 채 각자의 길을 간다. 단순한 스토리이지만 <라라랜드>는 작품 속 음악이 로맨틱한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관객을 설레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에 반해 <그녀에게>는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 라기보다는 두 연인들의 불완전한 사랑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며, 관람자로 하여금 관찰자적 입장에서 사랑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영화 “그녀에게” 한 장면


남자 간호사 베니뇨는 자신의 집 건너편 무용 학원에서 무용 연습을 하는 알리샤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아빠 없이 자란 베니뇨는 홀로 된 엄마를 사랑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지만 결국 엄마는 세상을 떠난다. 혼자 남은 외로움과 공허함을 자신의 집 건너 무용학원에서  춤 연습을 하는 알리샤를 바라보는 낙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알리샤는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인해,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베니뇨는 엄마를 오랫동안 간호한 경험으로 그녀가 입원한 병원의 간호사로 취직해 식물인간이 된 그녀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한다. 또 다른 연인들의 러브 스토리가 영화 속에서 진행된다. 투우사 리디아와 여행 기자 마르코의 사랑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리디아와 마르코는 연인 관계로 빠져 들지만 과거 실연의 상처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러는 가운데 리디아는 투우 경기 도중 사고로, 알리샤처럼 식물인간 상태가 된다. 코마 상태가 된 연인들을 간호하는 마르코와 베니뇨는 두 번째 만남을  병원에서 가지게 된다. 이 둘은 현대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공연을 우연히 함께 관람하게 된 첫 번째 만남을 상기시키게 되고, 비슷한 상황에  놓인 두 남자는 가까워진다. 리디아 앞에 옛 연인이 나타나고 자신의 과오를 속죄하지만, 결국 리디아는 죽는다. 또 알리샤는 베니뇨의 아기를 임신하게 된다. 아기를 낳는 과정에서 아기는 죽고 알리샤는 식물인간 상태를 벗어나게 된다. 알리샤를 임신시킨 죄로 베니뇨는 감옥에 같이 게 되는데, 베니뇨의 소식을 전해 들은 마르코는 그와 세 번째 재회를 하게 된다. 그리고 베니뇨가 자살하기 전까지 이 둘의 우정은 깊어진다. 그리고  베니뇨는 알리샤가 무용 연습 하던 학원 건너편 자신의 집을 마르코에게 준다는 유서와 함께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미카엘 하네케, 쥬세빼 토르나토레, 그리고 스페인 출신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내가 좋아하는 유럽의 영화감독들이다. 쥬세빼 토르나토레의 작품은 대부분 편안하고 따뜻하여 호불호가 갈리지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는 다소 폭력적인 요소와 더불어 난해하고 보는 내내 불편하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작품은 편하지 않는 관계로 엮인 인간들의 이야기가 많다. 이 두 감독들의 작품이 불편한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드러내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의식에 쌓인 인간의 폭력성과 억압을 드러내어 보여 주기에 이런 인간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因緣)'과 ‘인과(因果)“로부터 나온 인간관계와 그것으로 인해 펼쳐지는 상황들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토마스 만의 소설에서 읽히는 '과거의 재현과 반복', '동일성의 비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이 두 감독의 영화를 보다 잘 이해하면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관람자의 지적 수준과 문해력,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경험을 겪어본 관람자들만이 이 두 감독의 영화 속 깊이와 내공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 여겨진다. 아마 나 또한 나이가 들고 독서한 시간들이 축적되다 보니 이런 영화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 같다.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분명히 좁게 세상을 바라봤을 것이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영웅 스토리, 모험 판타지에 익숙한 관객들은 유럽 영화들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유럽영화는 한 편의 문학을 읽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드러내주고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기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제자들과 지인들에게 좋은 유럽 영화를 자주 추천해주기도 한다. 



“그녀에게"를 본  관람자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베니뇨가 알리샤를 임신시킨 사건일 것이다. 다소 변태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베니뇨가 순수하게 알리샤를 간호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녀가 베니뇨의 아기를 가진 사건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여기서 대부분 관객들이 지나쳤을 것 같은데 마르코가 리디아의 상태와 관련해 의사와 상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의사는 이 코마 상태에 오랫동안 누워있다가 깨어나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환자가 임신을 하게 되고, 애를 낳는 과정에서 아기는 죽고 환자는 식물인간 상태를 벗어나 정상으로 돌아온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이 의사의 말이 베니뇨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베니뇨는 이 이야기를 자신이 간호사이게 전해 들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베니뇨가 자신의 엄마를 간호하면서 얻은 간호 노하우를 바탕으로 알리샤를 일어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임신이라는 것을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간호사 베니뇨가 식물인간인 환자에게 성행위를 했다는 것에 집착하면 이 영화의 본질을 잃어버릴 수 있다. 베니뇨가 순수한 남자라는 사실을 영화 내내 보여주기에 이것을 근거로 그의 행동을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순수성은 아버지 없이 자란 엄마와 함께 늘 생활한 베니뇨가 마르코에 대해 우정이상의 존경심과 신뢰로 이어진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영화 속, 관객에게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고 흘러가지만, 마르코가 감옥에 갇힌 베니뇨의 면회장면에서 마르코가 쓴 책에 감동을 받은 베니뇨는 그런 마르코의 영혼을 우정 이상으로 좋아하는 뉘앙스를 보여준다. 정말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면 베니뇨처럼 행동했을 법하다. 설득력이 없지 않다. 단순히 베니뇨를 변태 성욕자라고 치부하기에 그의 순수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역 너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르코가 알리샤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베니뇨는 마르코를 오히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 베니뇨는 마르코의 순수한 영혼을 읽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첫 장면, 피나 바우쉬의 무용극 "카페뮐러"를 보면서 실연 당해 우는 마르코에 대해 베니뇨는 연민을 느낀 것이 시작이었다. 마르코에 대한 이 인연으로 그에게 신뢰를 가지고, 베니뇨가 목숨 끓기 전, 자신의 집을 마르코에게 넘겨주는 것은 동시에 알리샤 또한 마르코에게 부탁한 것과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무용공연에서 '인(因)'이 되어 마르코와 알리샤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연(緣)‘이 되는 것이다.
 
페도르 알마도바르의 작품은 이런 인연으로 이어지는 영화가 많다. <페인 앤 글로리>에서는 주인공 '살바도르 말로'가 어렸을 때 만나 자신이 글을 가리킨 청년에게 느낀 것이 순수한 첫사랑이었을 받아들이고 인식하게 된다. 그 순간 살아오면서 겪은 사랑의 상처를 받아들이고 오랫동안 시달린 만성 두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페넬로페 크루즈 주연 <귀향>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성폭행에 대한 경험이 자신의 딸에게 인과(因果)되어 이어진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으로 인한 분노가 예기치 않은 복수가 대를 이어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가족 간의 성폭행이라는 부분에 초점이 있기보다는, 삶이라는 것이 결국 이어짐의 연속이며 반복되는 패턴에 대한 세상의  본질적인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힘든 상황에서 가족을 서로 잘 이해하게 되고 좀 더 사랑하고 용서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페도르 알마도바르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작품은 인간의 의식을 거부하고 무의식의 세상과 세계를 파헤쳐 현실적으로 그려준다, 냉혹하리 만큼 말이다. 뭔가 포장해서 시치미를 떼지 않는다. 그냥 드러낸다. 그래서 포장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들의 영화는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거장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면, 삶이 보다 자유로워지고 인간을 이해하는 힘을 장책하게 될 것이다. 살면서 겪게 되는 예기치 않은 상황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라라랜드>의 러브 스토리보다는, 스페인 영화 <그녀에게>가 삶의 통찰에 대한 에너지와 깊이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