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요셉과 그 형제들 깊이 읽기 (feat. 지식인의 책무)

Christi-Moon 2024. 3. 10. 14:48

작년 9월쯤부터 읽기 시작한  토마스 만의 장편 소설 6권(살림출판사 기준), <요셉과 그 형제들>을  6개월에 걸쳐 두 번씩 모두 읽었다. 다시 1권부터 한번 더 읽을 예정이다. 토마스 만은 독일 문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가라고 평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처녀작인 <부덴부르크 가의 사람들>에서 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가문 안에서 벌어지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의 첫 장편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깊이가 상당했다. 그 외의 그의 단편들과 <마의 산> <파우스트 박사>를 읽으면서, 방대한 그의 지식에 한번 놀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드러내서 글로 풀어주는 예리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아직 한국에서 번역된 그의 작품을 다 읽어보지는 않아서, 올 한 해도 토마스만의 작품을 위주로 읽으려고 한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은 토마스만이 거의 16년에 걸쳐 써진 작품이다. 창세기 27장에서 50장에 쓰여있는 야곱과 요셉의 길지 않은 이야기를 토마스 만의 상상력, 통찰, 직관으로 풀어나가는 그의 지성은 세계 최고의 작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신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신의 역사, 신의 속성, 신의 종류 등,  알지 못했던 신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은 새로운 세상을 안내받은 느낌을 받았다. 이 소설은 종교를 넘어 보편적 인간에 대한 속성과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의 보고(寶庫)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마스 만의 필력은 신성이 깃든 혼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왜 인간이 태어나 공부를 해야 되는지 독서가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더 깨닫게 되었다.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독서량이 요구돼야 할 것 같다. 그래야 토마스 만의 작품을 보다 쉽게 받아들이 수 있는 바탕이 되어 그의 작품의 깊이를 더 이해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어를 잘해 원문을 읽어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배우고 아는 것은 소중하고 끝이 없어 보인다.
 
이 긴 소설을 번역한 장지연 번역가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다. 사실 번역 작업은 번역의 수고로움에 비해 번역자에게 큰 이익을 남기는 일이 아니라고 들었다. 이런 장편을 번역해야겠다는 결심은 토마스 만을 사랑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고 이런 좋은 글을 공유하고 싶은 소명과 선한 마음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했으리라는 생각된다. 얼마 전에 읽은 2011년 미국 하버드 대학 한인 학생들이 발간한 <하버드는 공부벌레 원하지 않는다>의 머리말에 나온 글 중, 하버드 한인 학생회 소속 학생들이 이 책을 출간하면서 나온 출판 의도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줬다. 개인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누리기 위해 하나라도 더 배운 이들의 책임감, 즉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의식을 지니고, 자신들이 쌓은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는 목적의식에 대한 글이었다.
 

유학생들은 내가 자란 가족과 사회, 국가의 큰 도움 덕에 '최고의 고등교육'을 받는 행복한 집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가 받은 것을 어떤 형태로든 사회에 환원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버드는 공부벌레를 원하지 않는다>가 유학생들이 사회에 보답하고자 하는 흐름에 마중물 역할을 한 책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을 번역한 장지연 번역자도  유학시절 독일 친구를 통해 이 책을 접하게 된 스토리가 감동적이었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에서 우연하게 만난 살림 출판사 사장이 이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며, 이 책을 한국 독자에게도 읽히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는  미담은 지식인들의 책무를 솔선수범해서 보여주는 좋은 예로 보인다.
 

괴팅엔에서의 만남을 통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 희망을 줄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 옌스는 이번엔 이별의 선물을 통해 내게 "우리들 삶이야말로 신이 쓴 한 편의 거대한 시다"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떠났다. 엔스가 이별의 선물이라면서 내 책상 위에 얹어 놓고 떠난 생기 바래고 낡은 소설책, 그 소설이 바로 토마스 만의 "요셉"이었다... 그리고 16년이 흘렀다... 우연히 만나게 된 살림출판사의 심만수 사장이 어느 날 문득 내게 물었다. 토마스 만의 '요셉 소설'을 혹시 읽었느냐고. 나는 정말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 사장은 전 주한 독일대사였던 플러스 박사가 젊은 시절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 토마스 만의 '요셉 소설'이었고 그 소설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나침반 역할을 했는지를 설명한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면서, '요셉 소설'을 번역해서 한국 독자들에게도 읽히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요셉'과 다시 만났다.

 



연예인들이 몇 백억 되는 빌딩을 은행에서 손 크게 해주는 대출을 이용해 건물을 구매해 많은 이익을 남기고 되팔았다는 기사를 읽으면 씁쓸하다. 연예인들이 큰돈을 벌어 빌딩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감이 아니다. 그런 기사를 내는 언론의 의도를 따져 묻고 싶다. 아마 그 기사의 당사자인 연예인들도 이런 언론의 노출을 꺼릴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여러 형태의 직업을 가지고 세상이 공존해서 살아가지만 적어도 자신의 직업이나 일이 사회에 어떤 파급 효과를 미치며 영향을 줄지 고민할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요셉 소설을 출판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힌 살림 출판사 사장님은 출판인의 책무를 실천하는 존경받을만한 분으로 보인다. 요셉의 소설의 출판이 큰돈을 벌기에 쉽지 않은 종류의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책이 번역되어 읽히고 그 책의 판매부수는 한 나라의 국민들이 지닌 지성의 척도를 가름하는 기준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유학 때 만난 번역자의 독일인 친구와 살림 출판사 사장님이 읽은 독일 대사 인터뷰 기사가 어쩌면 토마스 만이 이 책을 심혈을 기울여 쓴, 에너지 파동의 여파일 것이고, 그것이 지금 나에게 까지 흘러 들어와 있는 것이다. 토마스 만의 육신은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그의 정신과 영혼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만이 창세기의 요셉을 다시 탄생시킨 것처럼  이 책은 나를 다시 탄생시켰다. 새벽에 일어나 <요셉과 그 형제들>을 읽으면서 갑자기 이름을 바꾸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우물에 나와 이집트로 팔려가는 요셉은 형들로 인해 우물에 빠졌던 그 당시, 과거의 실수와 잘못을 스스로 기꺼이 받아들인 후 과거의 요셉을 죽이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오사르시프'라고 바꾸어 말한다. 이것이 나에게도 이어졌다. 원래 내 이름이 특이해 부르기도 어렵고 한번 기억되면 잊히기 어려운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오래전부터 바꾸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굳이 실천에 옮기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단지 이름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바꾸고 싶었다면 이 소설을 읽으며,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다. 과거의 실수를 반성하고 다시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요셉의 의지가 스스로 이름을 바꾼 것처럼 나 또한 그러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새롭게 내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요셉처럼 과거의 잘못된 실수를 반복을 하지 않고 싶다. 이름을 개명하면 사람들이 변경된 이름을 자꾸 불러줘여야 좋다는 말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름이 바뀌었다면 사람도 바뀌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야 이름을 진정으로 바꾼 것이 아닐까 싶다. 우물에 빠진 요셉이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반성 후에는 또다시 닥쳐온 고난과 역경에도 지혜롭게 극복해 나간다. 세상을 자신 중심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요셉의 의지는 스스로 이름을 바꾼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 또한 요셉을 닮고 싶다.

토마스 만의 영혼의 힘은 대단하지 않은가. 독자의 이름도 바꾸게 하고,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드니 그 힘은 거의 신적인 위력과 버금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최고 '지식인의 책무'가 아직까지 이어져 빛을 발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지금까지 독자에게 선한 영향력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감동 그 자체이다. 여러 지식인들의 수고로움을 통해 <요셉과 그 형제들>이 대한민국 어느 독자에게 까지 전해지고, 책을 읽은 그 독자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의지와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섭리가 나에게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요셉처럼 나 또한 ‘축복받은 자’라는 생각이 드니 기쁘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