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록

영화 더 헌트 (feat. 사슴 사냥이 주는 의미)

Christi-Moon 2024. 6. 16. 05:51

영화 <더 헌트>는 2020년 작 <어나더 라운드>에서 마르틴 역을 맡았던 덴마크 배우 매즈 미켈슨에게 2012 넌 칸 국제영화제에서 남우 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이 두 작품 모두 <토마스 빈텐베르크>가 각본을 쓰고 감독 한 작품으로 두 작품 모두 매즈 미켈슨과 토마스 빈텐베르크의 대표 작품이 아닐까 싶다.  5년 전쯤에 관람했던 작품이지만, 지금 보니 무심코 지나쳤던 내용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빈틈없는 극 구성으로 스토리가 세밀하게 잘 짜여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이혼남 루카스는 자신이 사는 동네 유치원 보조 교사로 일 하고 있다. 유치원 아이들은 유독 루카스를 좋아하고 어린 시절 친한 친구 딸인 클라라도 그 유치원을 다닌다. 클라라는 따듯하고 친절한 루카스와 그의 개 패니를 잘 따르지만, 루카스는 어린 소녀 클라라의 적극적인 감정 표현에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루카스 반응에 상처받은 클라라는 원장에게 루카스에 대한 거짓 이야기를 전하고, 클라라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게 된 루카스는 유치원에서 쫓겨날 위기에 선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지닌 원장은 루카스를 아동 성추행범으로 몰아가 이 사실을 그 동네 학부모들에게 알리고 사건은 일파만파 커지게 된다. 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받은 루카스는 무혐의로 풀려나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성추행범으로 여겨 루카스와 그의 아들 마르쿠스를 궁지에 몰아넣고 심지어 루카스의 애견 패니까지 죽게 만든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루카스는 크리스마스이브 예배가 있던 동네 교회에 참석하고, 클라라의 아빠이며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테오에게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행동을 한다. 테오는 루카스의 이런 행동에 의심을 풀게 되고, 클라라는 자신이 한 거짓말을 아빠 테오에게 시인한다. 모든 오해가 풀리지만 그로부터 1년 후, 루카스 아들 마르쿠스의 사냥 허가증 축하연이  열린 날, 사냥터에서 사냥하던 루카스는 누군가의 총에 맞을 뻔한다. 루카스의 공포와 의구심 어린 표정이 클로즈업되고 영화는 끝이 난다. 



2만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더 헌트> 영화 평을 유튜브에서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동진 평론가의 이야기가 뭔가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영화평은 인간이 인간을 사냥했다는 의미로만 한정해, 뭔가 아쉬움이 남는 영화평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영화의 핵심은 사슴 사냥에 대한 시각이 가장 우선시돼야 한다고 여겨진다. 이 사슴 사냥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아원자 사건들 간에 존재하는 듯한 ’상호 연결성‘에 대해 기초를 닦은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양자 이론과 사슴 사냥은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또 이 ‘상호 연결성’을 지지한 또 한 명의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이 ‘전일성’ 이론을 가지고 설명한 ‘사고 (thought) 체계’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통찰이 이 영화 속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들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덴마크 출신 토마스 빈테베르크 감독에게 묻고 싶다. 당신 나라 출신인 과학자 닐스 보어와 데이비드 봄의 양자이론에 영감을 받아 작업한 영화 아니냐고 말이다.

과학을 떠나 불교에서도 말하지 않는가. "인연과보"라고. 모든 것의 결과는 자신이 지은 연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던 사슴 사냥이 상호 연결성을 가지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닐까 싶다. 순수한 마음을 지닌 루카스는 억울했을 것이다. 스스로 성실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치원의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화장실 뒤처리도 해주며, 원장이 시킨 대로 놀이터 청소는 물론 겨울에 친구가 수영하다가 쥐가 나면 강물에 뛰어들어가 친구를 도와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혼했어도 사슴을 닮은 자신의 아들 마르쿠스를 여전히 끔찍하게 사랑한다. 그런 그지만 사슴고기를 즐겨 먹고 사슴 사냥을 잘하는 스마트한 사냥꾼으로, 사냥에 대한 특별한 죄의식을 느껴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자신이 인간의 사냥감이 되기 전까지 말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 루카스는 사슴이 가까이 있었도 쏘지 않고 상념에 젖는다. 왜 그랬을까? 그 상념에 젖어있던 찰나 누군가가 햇빛 때문에 루카스를 사슴으로 착각했는지, 아니면 진짜 루카스를 죽이려고 했는지, 루카스의 환상인지 모르지만, 사냥감이 되어 죽을 수 도 있었다.
 
사슴의 영혼이 클라라에게 그리고 유치원 아이들에게 들어가 마을 어른들을 공격한 것이 아닐까? 이 생각에 대한 근거는 지하실이다. 아이들이 루카스가 지하실에서 성추행을 했다는 상상력을 발휘해 경찰에게 진술한다. 물론 루카스의 집에는 지하실이 없어 혐의를 벗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는 한다. 그러나 마르쿠스의 대부이며 루카스 친구였던 브룬의 집 지하실은 사슴 사냥을 하고 난 후, 동네 남자들이 사슴고기를 먹으며 술을 먹는 파티 장소이다. 또 마르쿠스가 집 열쇠가 없어, 아버지의 친구이자 대부인 브룬의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가 대화를 나눈 장소가 사슴 사냥을 한 뒤 모임을 한 바로 그 지하실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유치원 생들이 이야기한 루카스 집 지하실이 바로 사슴고기와 술 파티가 열렸던 그 지하실과 동일한 맥락의 상징적 공간이 아니었을까? 유치원 원장처럼 브룬도 마르쿠스에게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 심장한 말을 한다. 토마스 빈텐베르크 감독은 사냥한 사슴을 먹었던 이 지하실을, 어른들이 나쁜 짓을 하는 공간의 상징적 의미로 묘사했을 것이다. 신이 자신의 일부인 사슴을 죽인 죄를 물어, 인간들에게 벌 주기 위해, 루카스를 선택한 뒤 십자가에 매달아 못 박히는 고통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사슴 사냥을 그만두게 하려고 말이다.
 
성경에서도 이야기하지 않는가. 너 자신만 (너 가족만 사랑하지 말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자연의 일부인 사슴은 우리 이웃이 아닌가? 우리 인간은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자연을 파괴시키고 훼손한다. 죄의식 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연이 주는 경고 메시지가 아닐까? 영화 속 마르쿠스 대부 브룬이 마르쿠스에게 이야기한다. 사냥 허가증을 받는 날은 "인간이 쥐가 되고 쥐가 인간이 되는 날"이라고. 그 말은 물리학자 닐스 보어와 데이비드 봄이 주장했던 ”상호 연결성“과 같은 매락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슴도 인간이 될 수 있고 인간도 사슴이 되어 사냥당할 수 있다는 말 아니겠는가. 크리스마스이브, 테오에게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안경을 벗은 루카스의 모습은 사슴 얼굴과 사슴 눈빛 그 자체였다. 루카스의 고통 어린 슬픈 눈빛은 물리학자들의 이론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명 장면이었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 ‘인간들의 확증 편향’ 대한 것을 강조했는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데이비드 봄이 쓴 <대화에 관하여>에서 왜 인간이 지닌 ‘사고 체계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며 강조했는지, 그것을 증명해 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클라라는 루카스를 자신의 아빠 테오와 동일시했을 뿐이다. 클라라가 동일시할 수 있었던 근거는 루카스와 테오는 죽마고우라는 점이다. 테오의 부인이 외출하면서 먹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 라자냐도 함께 먹어 치우고, 테오는 루카스 집 열쇠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친하다. 그리고 루카스는 테오 부부가 해주지 못하는 부모의 행동을 클라라에게 해준다. 아버지까지 아니더라도 삼촌인 것이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아빠나 삼촌과 결혼할 것이라고 흔히 말하지 않는가. 그것에 과민 반응 하는 남자야말로  편협한 사고를 가졌기 때문  아닐까. 아들을 키우고 여자와 관계를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이혼남 루카스는 데이비드 봄 이론을 빌려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과거의 기억과 자신의 경험만을 가지고 자신에게 벌어지는 상황을 해석하기 때문에,  잘못된 견해와 판단을 불러일으키기 쉽다고 말이다. 루카스의 잘못된 사고 체계가 스스로 화를 좌초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의견은 과거 사고(thought)의 결과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경험, 다른 사람에게서 듣거나 듣지 않은 내용 등은 우리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의견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무조건 지키려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우리가 의견을 스스로를 동일시하면 옳고 그름의 여부에 상관없이 그것을 고수하게 된다. 의견이 도전을 받으면 자신이 공격을 받은 것처럼 느낀다. 이처럼 의견은 각자의 가정이고 각자의 경험에 불과 란데도 '진리'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교사 가족, 독서를 비롯한 몇몇 방식을 통해 의견을 얻는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을 의견과 동일시하고 방어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데이비드 봄의 <대화의 관하여>중에서-

 
아마도 루카스는 클라라에게 자신의 행동과 말이 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화 후반 장면, 루카스가 먼저 다가가 클라라를 안아줄 수 있었을 것이다. 루카스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느 누구보다도 순수한 사람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봄의 말을 빌리면, 이런 사람조차도 세상 구조가 자신의 ‘사고 체계’를 통찰하고 제대로 인식하기, 어려운 시스템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유치원 원장은 더 심각하다. 아이들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고착된 신념에 빠져 있다. 동네 친구들과 이웃들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생각들을 진리로 확신하고 행동한다. 이런 집단 사고는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함정에 빠져 봄의 말대로 세상을 교란시키고 더 나아가 폭력을 야기시키게 되는 것이다.
 
신에게 ‘선택받은 자’ 루카스는 자기 대신 죽은 희생양 애견 패니를 묻어주면서 자신이 무심코 죽인 사슴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친구와 동네 사람들이 가한 폭력과, 패니와 사슴의 죽음이 동일하다 것을. 경쟁 사회 속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냥하는 것은 너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지 않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상호연결성과 시 공간을 초월한 전체성 이론으로 비추어 봤을 때 인간도 사슴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사냥한 것처럼, 인간도 사슴(자연)의 사냥감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이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자연(사슴)은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는 자연의 이웃이다. 즉 인간이 자연이고 자연이 곧 인간인 것이다. 자연의 훼손은 결국 인간인 우리 자신을 훼손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연 훼손의 대가는 결국 인간이 치르게 될 것이다.  루카스처럼 말이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의 ‘상호 연결성’과 ‘대화에 관한 이론‘이 영화 <더 헌트>에서 그야말로 멋지게 구현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