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유럽의 도시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수준 높은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이 있고 한국보다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온라인 예매사이트로 쉽게 표를 예매하고 티켓도 모바일에 저장해서 사용하니, 공연을 보기 위해 줄 서서 티켓을 사야 할 필요가 없다. 지난가을 스페인 여행 첫 장소인 바르셀로나에서 연극 한 편, 오페라 한편, 플라멩코 공연 한편을 관람했다. 런던 파리 베를린 스톡홀름 암스테르담 비엔나에서 관람한 공연들은 대부분 좋았다. 유럽 공연장 시스템의 기술력은 놀랍다. 뛰어난 조명기술과 화려한 무대 세트는 우리가 따라가기에는 아직 멀었다. IT 강국인 대한민국, 예술 강국 유럽, 공연을 전공한 나로서는 후자가 더 부럽다. 물론 도시 안에서도 대표 격인 공연장을 관람했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유럽의 공연장은 내게 꿈의 장소이며 선망의 대상이다. 우선 예술 단체에 대한 공연지원 시스템이 잘 되어 있으니 공연질이 좋을 것이다. 영국의 NT LIVE의 공연 영상을 보여 주기 전, 무대 뒤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의 작업과정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온다. 각기 전문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만들어내는 작업 과정을 보고 그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자신이 맡은 분야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 역사가 깊어서 그런지 모른 지만 영상 쪽을 선호하는 우리와는 다른 듯하다. 세계 제일의 극작가들이 남긴 훌륭한 글들을 오래전부터 공연되어 왔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 배우기 시작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 수준을 비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카탈루냐 국립극장에서 관람한 연극은 <Mort de Riure>였다. 제목을 해석해 보면 "웃음으로 죽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극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한 관객 한 명이 죽는다. 그 관객역을 맡은 배우 한 명이 관객들과 공연 시작부터 앉아 있어서 배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튼 공연에서 한 인물이 죽을 거라 관객들이 예상하고 있었는데, 죽은 것은 무대 배우가 아닌 관객이 너무 웃어서 죽은 것이다. 재기 발랄하고 신선한 공연이었다. 그리고 공연이 당연히 무대에서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고 극장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공연 시간이 지나 극장 내부에서 배우들이 뛰쳐나와 야외로 나갔고 공연은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기량이 상당히 뛰어났다. 사실 위험한 장치와 소품 사용이 무척 위험하다고 느껴지는 공연이었다. 물론 위험해 보이는 소품 사용은 작품의 의도였을 것이다. 서커스적인 요소가 가미된 코미디였지만, 위협을 느끼게 하는 소품 사용을 통해 관객들을 오싹하게 만들고 땀을 쥐게 하며 긴장감을 높였다. 공연팀은 안전에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훈련이 잘된 배우들임에 틀림이 없다.
여담이지만 연극 공연이 끝난 그날 밤, 늦은 시간이니 바짝 긴장하고 숙소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갔다 그런데 버스가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고 있었다. 바르셀로나는 소매치기도 많다는 블로그 정보도 많고, 혼자 여행을 하던 터라 여행지에서 특히 공연 관람하는 날 빼고는 밤 시간에 되도록 숙소에 있었다. 그런데 아마도 작년 9월 아직 코로나가 여파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기에 버스 노선을 축소해서 운영했었나 보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고, 숙소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당황하고 두려움이 커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좀 걸어서 지하철을 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밤늦게 지하철을 타 본 적이 없어 망설이다가 지하철 역으로 빠른 걸음으로 아니 뛰다시피 했다.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쪽 지하철역이 거기서 제일 가까웠다. 그런데 순간 느꼈던 두려움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지하철 근처에 사람도 많았고 지하철 안은 상당히 안전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있다. 쓸데없는 두려움은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게 방해하고, 자칫 그릇된 행동과 생각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계획된 여행에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삶도 그러하듯 계획대로만 삶이 흘러간다면 오만에 빠지거나, 새로운 경험을 통해 깨우칠 수 있는 것들이 없을 것이다. 그날 이후 밤 공연 관람 가기 전 교통편을 지하철과 버스 루트를 다 파악하고 또 도보로 얼마나 걸리는지 경우의 수를 넓혀 검색한 후 움직였다. 예기치 않은 경험은 소중한 것이다. 그날 밤 숙소에 돌아오니 잘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희열로 벅차올랐다.
카탈라냐 음악당 (Palau de de la Musica Catalana)에서는 플라멩코(Gran Gala Flamenco) 공연 관람을 했다. 여자 무용수들의 정열적이고 힘찬 공연도 멋졌지만 그것보다 이 극장의 화려한 내부가 더 인상에 남았다. 공연 중에 조명을 통해서 보는 공연장 내부는 신비롭고 환상적이었다. 이 극장의 건축은 1908년 모더니즘(아르누보양식)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루이스 도메네크 이 몬타네르(Luis Domench i Montaner, 850~1923)가 심혈을 기울인 걸작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한다. 건축가 몬타네르는 바르셀로나 여행객들이 감동을 받고 돌아가는 가우디의 스승이다. 이 몬타네르의 또 다른 건축물인 산 파우 병원도 보았는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우디가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다가, 몬타네르가 건축한 건축물을 보니 가우디 보다 몬타네르가 내 스타일이었다. 그의 건축물은 화려한 것 같지만 요란하지 않고 우아한 색의 배열이 안정적이고 정교하며,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몬타네르 "예술은 사람을 치유한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몬타네르의 건축물은 그의 말과 일치한다.
1847년에 지어진 오페라하우스 (Gran Teatre del Liceu)에서는 이탈리아 작곡가 도니체티의 오페라 “돈 파스콸레(Don Pasquale)” 공연 관람을 했다. 무대 뒤쪽 큰 스크린을 통해 클로즈업된 배우들의 얼굴에서 섬세한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에르네스트 역을 맡았던 남자 오페라 가수의 섬세한 노래 선율이 로맨틱하게 들려와 심쿵했었다.
이런 공연들을 여행지에서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내 삶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대도시 여행자들에게 공연 관람 기회를 꼭 가져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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