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의 흔드는 바람>에서 느껴진 켄 로치 감독의 내공은 <지미스 홀>에서도 이어졌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배경에 산과 초록으로 둘러싸인 좁은 길에 등장인물들이 지나가는 장면이 곳곳에 나온다. 아일랜드라는 나라가 섬이고 그 안에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나라가 아닌가 싶었다. 초록으로 둘러싸인 산 길을 지미가 지나가는 영화 속 첫 장면을 보면서, 외부의 침입이 쉬운 섬나라이기에 이 산에 둘러 쌓여 외부의 영향력을 받고 싶지 않고자 하는 아일랜드인의 의지가 이해되었다. 아마도 개방성과 폐쇄성이 공존하는 나라이기에 자국민 사이에 갈등도 그런 영향을 받아서 잦았을 것이라 보인다.
경제 부흥기를 거쳐 대 공황에 빠져있던 미국 뉴욕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지미는 거의 10년 만에 고국 아일랜드로 돌아온다, 그의 귀향을 환영하는 혈기 넘치는 젊은 친구들은 지미에게 자신들의 배움을 이끌어 주도록 요구한다. 지미는 마을 회관을 보수하고 자신이 미국에서 경험한 세상을 배우게 하고 그들에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한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마을 신부와 기득권들은 지미를 공산주의자로 몰면서 마을 회관을 불태우고 지미를 다시 미국으로 강제 추방 시켜 버린다,
영국에서 독립하고 곧바로 아일랜드는 내전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영화 속 아일랜드의 국가 내부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었다. 영화 속 지미가 고향에 돌아와 복원한 홀은 과거의 것을 새로운 것에 접목하고자 했던 지미의 의지를 상징해 주고 있다. 지미는 미국의 예술 문화를 무조건 받아들이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는 과거의 추억도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미:(우나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미국에서 사 온 선물을 주며) 좋아 보이네.
우나:당신은 머리가 희끗희끗해도 여전히 늘씬하네.
우나:편지는 왜 끊었어?
지미:알잖아... 애들은 어때?...
지미:똑같지 뭐
우나:10년 후에도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
우나는 결혼했지만 지미는 우나와 함께 했던 과거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어쩌면 지미처럼 과거의 것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더 잘 해낼 수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미는 자신이 보는 세상 이외에 미국이라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미는 통찰하고 있었다. 늘 하던 대로 살고자 하는 관성에 벗어나기 위해, 용기의 에너지와 추진하는 의지가 인간에게 요구되지만 아무나 그런 에너지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지미는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노동자 신분이지만 끊임없이 책을 읽고 이웃에게 좋은 영향을 베푸는 것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도리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영화 속 지미가 해낸 가장 큰 일 중에 하나가, 어쩌면 나이 많고 보수적인 신부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 중반 신부님은 지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미 쉐리던 신부는 지미를 제대로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아래 대화 장면이 흥미로웠다.
쉐리던 신부: '모든 계급 환영' 무조건 반항적이야.
시머스 신부: 무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탄압은 저항을 낳는다잖아요.
쉐리던 신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빨갱이들 구호지. 거의 종교 수준이야 '네 이웃을 사랑하라' 탐욕이 만연한 세상에서 불처럼 번지는 이념이지. 빈자나 실업자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이겠나?
.....
쉐리던 신부: 그 녀석 모친은 이동 도서관을 운영했지. 독학자들 무시 말게. 경험의 깊이가 크다네... 가슴속엔 불이 있고 머리는 치밀한 녀석이야... 탐욕도 없고 이기적이지도 않아. 최초의 순교자들이 생각난다니까... 처음은 춤이고 다음은 책일세 발끝에서 시작해서 머리를 주무르는 거지.
영화의 결말은 지미가 비록 다시 미국에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은 경제 호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대 공항을 겪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또 다른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아일랜드인었다. 지미는 미국 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보면서, 미래에 부를 거머쥐기 위해 경쟁하기보다는 현재를 즐기고 그 행복을 이웃에게 베풀어 주기를 원했다. 소외된 계층들에게 책을 읽히고 그림을 그리게 하고 권투를 하게 하고 춤을 추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저항하고 자신의 종교 신념을 꺽지 않았던 쉐리던 신부의 마음마저 움직인 것이다.
(위스키를 마시며)
쉐리던 신부:이게 어디가 잘못됐다는 것인가? 이 흑인 여자가 부르는 노래 말일세. 대단하지? 그랄튼이 오늘 왔었네. 배짱 좋게 이 레코드를 현관 앞에 두고 갔더군. 와서 고해까지 했어. 뭐라는 줄 아나? 그 녀석 말이 내 가슴속엔 사랑보다 증오가 많다더군.
미래를 이끌고 갈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현재를 즐길 줄 아는 예술을 전파하고 나이 많은 신부님에게 지미가 전해준 재즈 음반은 신부님의 잘못된 종교적 관점을 새롭게 전환시켜 주는 가교 역할을 해주었다. 지미는 자신이 만든 현재의 "홀"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관념적 틀을 부수고 그 시간들을 녹여내어 행복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고자 한 영웅인 것이다. 빌딩위를 기어 다니고 망토를 입고 날아다니는 스파이더맨 슈퍼맨은 아니지만 켄 로치 감독은 이 세상에 필요한 진정한 영웅을 자신의 영화 속 지미를 통해 구현해 낸 것이다.
켄 로치 감독에게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물론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이 덜 나쁜 곳이 되지 않도록 개입할 수는 있다 “라고 인터뷰때 말했다 한다. 켄 감독이 영화를 통해 한 일이 결국 지미가 하고자 했던 일과 일맥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지미가 예수의 본질이라면 켄 로치 또한 그러하다. 극히 드물지만 몇 안되는 또 다른 예수들의 숨은 기여가 살만한 세상을 유지시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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