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드라이빙 마이카 (feat.타인을 이해한다는 것)

Christi-Luna 2025. 1. 26. 09:34

무라카리 하루키의 단편 소설 <드라이빙 마이카>는 하마구치 류수케 감독이 거의 3시간 가까운 러닝 타임으로 제작된 영화도 있다.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보고 좋았지만 며칠 전 소설로 읽었을 때도 나쁘지 않았다.  영화와 달리 소설은 차 안에서 주인공 가후쿠와 그의 차를 대리 운전해 주는 다카시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소설은 배우 가후쿠의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쯤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다. 유명 배우 가후쿠는 녹내장 진단을 받아 시력을 읽을 위기에 처한다. 자신의 차를  몰기 어려운 상황까지와 가후쿠는 자신의 자동차를 운전할 운전사를 고용해야만 했다. 운전사는 자신의 죽은 딸과 나이가 같은 와타리 미사키, 그녀와 가후쿠는  이 차속에 많은 대화를 이어가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 대화 속에 가 후쿠의 내면의 상처가 점점 드러나 다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를 가지게 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자신의 노란 사브, 차 속에서 이루어진다. 드라마 작가였던 가후쿠 부인은, 딸이 죽고 난 뒤에 그 충격으로 가후쿠 몰래 지속적인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가후쿠는 이미 알고 괴로워했지만 부인에게 내색하지 않고 살며 지냈다. 얼마 후 가후쿠의 부인은 자궁함으로 죽는다.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지금 그 고통받았던 기억이 희미해지기도 했지만 그 당시 겪었던 고통은 작지 않았다. 부인이 바람피운 남자 중 한 명이 그녀의 작품에 출연한 젊은 배우 다카시다. 운전사 미사키에게 이런 과거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면서 자신의 과거 삶을 돌아보는 성찰과 상처에 대한 치유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는 조수석에 몸을 묻고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항상 운전석에서 핸들을 잡었던 그에게는 그 시점에서 바라보는 거리 풍경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가후쿠는 스스로 운전할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시력이 나빠지고, 조수석에 앉게 되면서부터 삶을 다르게 관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조수석과 녹내장은 어쩌면 늘 눈으로만 보이는 세상에 함몰된 시각을 회복해 주는 소설 속 하나의 상징적 장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운전석에서 운전할 때는 차가 가는 방향에만 집중해야 하기에 자신의 시야는 제한적이게 된다. 이것에 길들여지면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을 세상이 전부라 생각하고 사고도 좁아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물리적 눈의 시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모순이 생길 수 있다.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과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삶에서, 한 발 물러나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살펴볼 기회를 가지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 다라고 생각했다면,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자신의 내면에 더 귀 기울일 수 있다는 점을 하루키가 말하는 이 소설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부인이 죽은 뒤 흘러간 세월 역시 그 당시 괴롭고 힘들었던 상황으로 인한 상처가 희석되어 달리 해석될 수 있는 한몫을 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는 말이, 이 이야기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깊은 상처가 시간이 흘러, 약이 되고 그 과거의 상처가 자신을 성장시킨 마중물임을 깨닫게 된다. 그 고통스러운 과거는 시간 지나 지금에와 달리 해석되어, 자신을 성찰할 수 좋은 기회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우리 대부분은 타인에 의해서 그 괴로움의 원인을 찾는다. 이 소설에서 하루키가 말하려는 세상의 해석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자동차 안에서 보는 세상이 전부라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 세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즉 자신의 틀 안에서 보는 세상이 전부라 착각하기에, 타인이 보여준 세상의 해석을 내가 하는 것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세상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만의 세상인 것이다. 수만 명의 사람이 지구상이 있다면 수만 명의 세상이 있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다 실체'가 없음에도 자신이 본 세상, 그것이 전부인 것 마냥, 그것이 변화지 않는다는 견해를 가지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런 타인의 세상을 우리는 외면하며 살아갈 수 없다. 타인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루키는 다까시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전해준다.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설령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 해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려다 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것을 바란다면 자기만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였다 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결국 나 자신이 어떤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비로소 타인의 세상도 볼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고 집착하고 감정에 함몰되면 타인은커녕 나 자신도 몰라볼 수 있기 십상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강조하는가.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다들 내가 어떤지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만과 다른지 않음을 타인의 을 통해 그들의 자만심을 알아채기도 한다. 반면에 내 안의 도사린 자만심을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이래서 수행이 필요하고 자신을 돌아볼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명상을 하고 독서를 해야 그나마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을 탐구하는 여정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 함몰된 생각과 인식하지 못하는 충동들에 깨어 있는 을사년 한 해가 되었음 하는 바람이다